[기자수첩]용역업자가 만든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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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용역업자가 만든 대한민국
  • 조항일 기자
  • 승인 2021.09.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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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일 기자
조항일 기자

철학과를 입학하고 취업을 하기까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갔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그때도, 지금도 하나다. 단지 점수 맞춰서 그냥 갔을 뿐이다.

학과 점수가 높지는 않다. 그렇다고 공부도 쉬운 것은 아니다. 일단 전공과목은 대부분 영어 원서로 배우고 시험도 모두 서술형이다. 필자가 그랬듯, 졸업앞둔 4학년이 전공과목 재수강을 많이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질문의 진짜 의도는 “취업 어떻게 할래”다. 요즘에야 온갖 분야 뒤에 철학이 붙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철학은 언제나 조연이고 찬밥이다.

해외에서는 철학이 으뜸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철학의 위상은 경제대국일수록 그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오히려 더 존경받고 대우해주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한국처럼 철학과를 나왔다고 경영학과보다 취업난이도가 더 올라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철학박사만을 의미하는 Ph.D(Doctor of Philosophy)가 해외에서는 모든 박사학위에 붙는 이유다. 모든 학위의 끝판왕도 철학박사다.

한국에서 철학 취급받는 분야가 엔지니어링이다. 분명 공부는 남들보다 더하는데 대우가 시원찮다. 물론 요즘에야 워낙 인력난이 심하니 엔지니어링사에 지원만 하면 취업 100%에 에이스로 대우 받겠지만 그저 노가다, 용역으로 취급하니 기왕이면 돈 많이주는 시공사로 간다.

그래서 엔지니어의 꿈을 놓기 싫다면 영어 배워 해외로 나가는게 낫다. 특히 웬만한 선진국에서는 엔지니어가 꿈의 직업일 정도로 연봉도, 사회적 대우도 좋다. 전문가를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공무원과 엔지니어의 교차 이직이 잦을 정도다.

지난 6월 용역을 엔지니어링으로 대체하는 법안이 시행됐다. 업계의 오랜 염원이었던만큼 “이제 우리는 엔지니어다!”라며 희망찬 미래를 기대했던 초급 엔지니어들도 많았겠지만 연륜있는 시니어 엔지니어들의 예상이 맞았다. 우려가 현실이 됐다. 불러주는 곳이 아무도 없다보니 법이 바뀐 사실마저도 묻힐 정도다.

가장 큰 이유는 현업 종사자들, 특히 공무원들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마인드에 있다.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다. 철저한 심부름꾼 이미지였던 용역업자로 부르다가 엔지니어링은 웬지 공무원과 대등하거나 좀더 세련되보이기까지 하는 표현이 심기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이러한 자위는 틀렸다. 자동차 기술자는 엔지니어라고 하면서 국가 인프라 건설의 역군인 토목 엔지니어는 용역이라고 깎아 내려서야 되겠는가. 모두가 대한민국 산업을 이끄는 똑같은 엔지니어다. 왜 그들만 용역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하나.

해방 후 80년간 용역업자의 이름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세워준 이들이다. 너무 늦었지만,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보잘 것 없지만 이제라도 엔지니어라는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용역업자가 아닌 엔지니어가 만들어가야 한다. 언제까지 대한민국을 용역업자에게 맡겨 둘 셈인가.

발주처는 발주처의 일을 할 때 가장 빛난다. 그 시작은 엔지니어를 엔지니어로 불러주는 것 부터 시작이다. 엔지니어를 용역에 가두는데 혈안이 되는 것은 세계 10대 선진국 관료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다. 발주처도 국격에 따라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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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질사회 2021-09-10 09:18:02
엔지니어링업계의 선배들부터 바뀌어야 한다
나이 지긋하고 경력도 화려한 5~60대 설계사 임원들도
30대 초중반의 발주처 주무관에 머리 숙이고 들어간다
갑질한다고 욕하지만, 갑질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을질부터 하지 말아야 된다

아폴록시 2021-09-10 05:01:41
공무원은 국민의 심부름꾼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들도 공무를 수행하는 용역업자라고 부를 만합니다. 물론 그렇게 비하하면 개난리를 치겠죠. 엔지니어들도 발주처에 들어갈때 굽신굽신 거리지말고 당당해져야합니다. 어깨펴고 얼굴 빳빳하게 들고 이렇게 생각하는거죠! '공무를 수행하는 용역업자나부랭이들! 담당계장들은 뺀질대지 않고 일 열싱히하고 있냐?''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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