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장과 함께 한 한국엔지니어링협회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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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장과 함께 한 한국엔지니어링협회 40년
  • 정장희 기자
  • 승인 2014.06.0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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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링데일리)정장희 기자=1974년 6월5일 장성 출신 백석진 회장과 이사 12인을 선임하며 창립총회를 개최했던, 한국엔지니어링협회가 올해로 40돌을 맞았다. 설립당시 엔지니어링산업 규모는 업체수 86개, 총수주액 149억원에 불과했다. 현재 4,000개가 넘는 회원사와 총 수주규모가 7조원을 넘고 있으니 4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한 셈이다.

업계규모가 작다보니 초창기 협회는 청계천3가 5평짜리 사무실에 여직원 1명, 간사 1명이 전부였지만, 4대 회장인 전민제씨가 사비로 과총회관에 2칸짜리 방을 얻어주면서 비로소 협회틀을 갖추게 됐다. FIDIC의 승인을 받은 것도 이때로 협회는 82년 싱가폴 총회에서 회원으로 가입했고, 30년이 지난 2012년 서울에서 FIDIC총회를 개최하는 성과를 낸다.

▲ 80년대 홍콩과의 업무교류를 시작했던 엔지니어링협회
 ◆SOC황금기 90년대, 대가 100%인상, 등록제→신고제 전환
사비출연은 84년부터 회장직을 수행한 김형주씨 때도 계속돼 연간 수천만원을 들이며 정책제도 개선에 나섰다. 그 결과 88~89년간 엔지니어링대가를 총사업비 기준 2%에서 4%로 100% 인상하는 성과를 냈다. 현재 엔지니어링공제조합이 수행하는 공제사업도 태동은 협회로부터 시작됐다. 88년 공제사업부를 출범시킨 협회는 1년 뒤 기술용역공제조합을 출범시키면서 안정적인 엔지니어링활동을 가능케 했다.
 
9, 10, 11대 회장인 성백전씨 재임기간은 SOC활황과 맞물려 업계와 협회는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93년에는 기술용역법이 엔지니어링기술진흥법으로 전환되면서 협회는 일대 전환기에 들어간다. 기술용역법 당시 1년에 2번 과기처에서 사업자 등록을 받던 방식을 개선해 협회가 위탁수행하면서 신고제로 개선됐다. 이와 함께 정부가 정해주던 엔지니어 임금을 노임단가 조사를 계기로 실지급 임금으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낸다. 이 결과 이듬해인 94년에 엔지니어링사 수가 761개로 창립당시 보다 10배 가까이 늘어나고, 엔지니어의 임금도 큰 폭으로 오른다. 협회 재정도 93년을 기점으로 크게 늘어, 현재 엔지니어링협회 건물을 2000년에 매입하기에 이른다.
 
90년대는 중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공항, 경부고속철도, 분당선, 대전~진주간, 상암동 월드컵구장, 인천지하철 등 굵직한 사회기간망이 대거 건설되던 SOC황금기로 기록된다. 엔지니어링사 총수주규모도 90년 4,900억원에서 2000년 2조5,000억원의 5배 늘었고, 월드컵 특수를 맞이한 2002년에는 2년 사이 두배가 늘은 엔지니어링 5조원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21세기 맞이한 엔지니어링 해외진출-위상강화 화두
2000년 엔지니어링협회 회관에 입주한 협회는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며, 해외진출과 엔지니어링 위상강화에 집중한다. 2003년에 ‘제1차 엔지니어링기술진흥기본계획을 필두로 2004년 10월 18일 <엔지니어링 날>을 제정해 엔지니어링 유공자 35명에게 훈장 등 포상을 실시한다. 이 같은 포상 규모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것으로 엔지니어링업계 위상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2000년대 중반 해외진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해외시장 조사와 한중정례회의, TCDPAP 등 해외교류 활동이 증가했다.

▲ 2013년 엔지니어링의 날 당시 개회사를 하고있는 문헌일 회장
 엔지니어링협회가 큰 변화와 발전을 모색한 것은 기존 과학기술부에서 지식경제부로 주무부처가 이관되고, 문헌일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주무부처 변경으로 인해 기술로 한정되던 엔지니어링이 주체적인 산업으로 인정받게 된다. 법안도 엔지니어링기술법에서 엔지니어링산업법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 당시 <엔지니어링 발전방안>을 대통령에게 직접보고하는 성과를 낸다. 한편 2012년 꽉막힌 엔지니어링업계의 언로를 확보하기 위해 언론사인 엔지니어링데일리를 창간했다.
 
2010년 FIDIC조직위원회를 출범시킨 협회는 2012년 서울에서 FIDIC 99회 총회를 개최한다. 전세계 1,000명의 엔지니어링 리더들이 대거 참여한 서울FIDIC은 역대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참가자들은 고속철도, 송도신도시 등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인프라를 견학했고, 한국엔지니어링사와 전략적 연대를 모색했다.

▲ 2012년 서울 FIDIC 총회 당시 행사전경
서울FIDIC 총회의 성과에 힘입어, 2013년 100회 바르셀로나 FIDIC총회에서는 이재완 현임 회장이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FIDIC 차기회장에 오르게 된다. 82년 변방의 개도국인 한국이 FIDIC에 가입한지 30년만의 성과인 셈이다. 2014년 FIDIC차기회장인 이재완 회장은 엔지니어링협회장에 올랐다.

▲ 이재완 회장은 2013년 바르셀로나총회를 통해 FIDIC100주년 차기회장에 공식적으로 임명이 됐다.
21세기 시작에서 현재까지 엔지니어링업계는 꾸준한 성장을 구가했지만, 최근 국내 인프라 시설의 포화로 성장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다. 현시점에 업계와 협회 모두 대한민국 엔지니어링산업의 미래를 해외시장에서 찾아야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엔지니어링협회는 "걸어온 40년을 능가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동력에 마련해 업계를 지원한다는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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