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사질의 만드는 설계사, 손 안대고 코푸는 설계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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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사질의 만드는 설계사, 손 안대고 코푸는 설계심의위원
  • 이준희 기자
  • 승인 2018.04.04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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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기간 3개월 그림책 만드는 고강도 노동… 간소한 해외입찰과 반대
설계도서 제출 후 1개월 다시 상대사질의 준비… 주 52시간 워라벨 불가능
(엔지니어링데일리) 이준희 기자 = 턴키, 대안 등 설계기술이 당락을 좌우하는 입찰경쟁에서 설계사들이 심의위원들에게 상대사질의서를 만들어 주느라 한 달씩 주말도 없이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면밀히 설계검토를 해야 하는 심의위원들이 자신의 일을 설계사에 떠넘기고 손 안대고 코를 풀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 근로시간이 최대 52시간으로 정해졌다. 설계사 시공사 간의 불공정관행 개선대책에 이은 정부의 잇단 정책에 3~4개월 철야와 공휴일 출근이 일상이 된 턴키현장의 엔지니어들은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설계심의단계에서 공무원, 공기업,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들의 불합리한 요구가 여전히 만연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이 없어, 턴키현장의 ‘워라벨’이 결국 공염불이 될 것이라는 우려다.

정부는 설계심의 상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심의위원 사전 공개, 심의과정 실시간 중계, 청렴옴부즈만 도입, 심의결과 인터넷 공개, 심의위원 사후평가제 도입 등 심의제도 개선조치를 취하고는 있다. 그러나 입찰경쟁에 참여한 설계사들이 심의위원들에게 상대사질의서를 만들어 주는 관행이 남아있어, 심의위원들의 평가전문성이 약화되고 부실심의가 뿌리 뽑히지 않는다는 것.

최근 턴키현장을 다녀온 엔지니어는 “해외입찰에서는 발주처와 심의위원들이 요약서, 평면, 단면, 공사비, 수량 등 꼭 필요한 것들만 요구한다”며, “그러나 국내입찰에서는 설계자들이 납품해야하는 도서의 양과 종류가 지치게 많다. 보고서가 사실상 그림책이라 일러스트레이션 편집팀과 일을 해야한다.  조감도나 각종 실험계산서만으로도 1박스다.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뒤이어 “입찰공고 후 3개월 동안 이처럼 거의 밤도 주말도 없이 야근하며 최종 입찰설계도서를 제출한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심의결과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입찰참여 업체들은 경쟁사 질의, 공통질의 등으로 한 달 간 심의준비를 엄청나게 해야한다”며, “자사의 요약서 뿐만 아니라 경쟁사와 서로 비교한 요약서까지 작성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심의장에서 상대방을 제대로 헐뜯어 치명상을 줄 수 있을 만한 질문 만들려면 심의위원을 대신해 밤을 새워야만 한다. 정작 최종 판단은 심의위원이 해야 하는데 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부연설명이 필요한 경우도 허다하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엔지니어는 “해외공무원은 스스로 과업지시서를 만든다. 계약상에 필요한 구비서류를 본인들이 직접 다 검토한다. 발주자가 전문성이 있어 까다로운 기준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행정직 위주의 국내에서는 공무원이 기술력이 부족해 판단이 어렵다면 위촉된 심의위원들이 대신 해야 하는데, 지금은 입찰도서를 만들어줘도 버거워한다”고 했다. 뒤이어, “1달 안에 경쟁사의 것을 모두 봐야한다. 공격논리, 방어논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심의위원이 판단해야 하는 것을 왜 우리가 해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특히, 상대사질의를 받는 과정에서 시공사의 영업력이 반영돼 의도적으로 점수를 깎고 올리는 부실심사가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줄을 잇고 있다. 설계기술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턴키나 대안입찰의 근본적인 취지가 흔들리는 것으로, 상대사질의서를 심의위원에게 제출하는 악습의 고리를 시급히 끊어야만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심의위원들에게 보여주기식 설계를 하고 원하는 단가를 써내고 영업팀에서 원하는 논리를 요청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며, “영업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설계도서의 수준이 높아도 떨어지는 현 상황은 시급히 개선해야만 한다”고 비판했다.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주 52시간 근무가 턴키합사에서까지 현실화 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 발주처가 과도한 요구조건을 해외입찰 수준으로 간소화하고, 무엇보다 심의위원 스스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떠넘기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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