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카파도키아, 중세의 암벽사원
2013-09-04 .
콘스탄티누스가 선포한 밀라노칙령으로 모든 종교는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억압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자유는 아주 낯설었다. 순교 기회를 잃어 허탈해진 이들은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하거나 고행을 통해 구도에 이르려 하였다. 카파도키아 광야를 가득 채운 암벽사원, 그것은 굴레를 벗어난 이들이 다시 스스로를 가두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무희 타이스(Thais), 그녀의 이름 뒤에는 알렉산더의 정부, 파라오의 왕비, 멤피스 여왕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그저 매춘부로 그려지지만 프랑세(A.France)의 소설과 마스네(J.Massenet)의 오페라에서는 순결한 성녀로 그려진다. ‘타이스의 명상곡’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2010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춤출 때 연주되던 애끊는 바이올린 곡 말이다.
소설 ‘타이스’는 종교적 염원과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수도사 파프뉘스는 뛰어난 언변으로 무녀 타이스를 교화시킨다.
타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광야의 사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카파도키아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석굴과 암벽동굴을 보면 조금쯤 그들의 처지를 엿볼 수 있다.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절벽에 사원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수도생활은 그 자체가 죽음과 싸우는 일이었다. 신을 향한 염원, 그들의 열정 앞에서 우리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명상에 이르게 된다.
카파도키아의 역사
작은 왕국에 불과했던 메디아가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배경에 소아시아라는 수준 높은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르시에스(Erciyes)산의 분출은 아나톨리아 고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곳의 농경문화가 화산재로 인해 비옥해진 토지 덕이었다면 기암지대와 협곡 그리고 다양한 지하공간은 용암으로 인한 특이지층 때문이다. 충적사암층을 단단한 용암층이 덮으면서 구조적으로 안정된 지붕 역할을 해준 것이다.
아나톨리아 고원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길목이었다. 그 덕에 카파도키아는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BC.3세기까지 로마의 동맹국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에는 괴레메 석굴, 카이마클리 지하도시, 암벽사원 등 지하공간과 관련된 세계문화유산이 많다. 이는 거대세력이 피고 질 때마다 삶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의 뼈아픈 흔적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배경과 규모
암벽교회는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종교자유가 선포되자 기독교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 무렵 카파도키아 대주교였던 바실리우스(329~379)는 세속에서 벗어난 수도를 강조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광야로 떠난 수도자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수도자가 몰리자 동굴은 층층이 만들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암벽을 파내는 작업은 더 힘들었지만 이 정도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의 억압이 사라졌을 때 오히려 순교의 기회를 잃었다고 슬퍼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긴 했지만 이들의 삶은 20세기 초까지 근근이 이어졌다.
일라라(Ihlara) 계곡
초기 사원은 내부벽화나 시설이 거의 없지만 후기로 갈수록 규모도 커지고 점점 정교해졌다. 일라라 유적의 특징은 접근이 어려운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암벽동굴은 비교적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위를 파내는 기술은 물론 정이나 곡괭이 외에 쓸만한 도구도 없었던 수도자들이 이를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괴뢰메(Göreme) 사원
비록 동굴이긴 하지만 우아한 돔과 화려한 색채는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규모가 큰 정방형 사원은 정교한 실내장식을 갖추고 있다. 6세기경 만들어진 토칼리 사원이 이에 해당한다. 가장 흔한 형태는 방 하나로 된 예배실이다. 입구에는 작은 공간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수도자가 만든 자신의 무덤이다. 결핍과 고독을 견디며 신과 소통하려던 이들은 이렇게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
파샤바(Pasabag)의 버섯동굴
계곡에는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기묘한 바위로 가득 차 있다. 버섯기둥을 연상시키는 이 바위들은 사암위에 용암이 덮인 뒤 오랜 세월 아랫부분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5세기경의 성시몬 사원은 버섯 3개가 함께 자라는 듯한 바위에 있다. 내부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버섯기둥 형태로 볼 때 더 크게 만들 수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에게 불편을 견디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었으니 말이다.
이코노클라시즘(Iconoclasism)의 성화 파괴
성상파괴주의로 불리는 이코노클라시즘은 725년 레오 3세의 예수상 파괴로 시작되었다. 이후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를 이유로 성화나 조상은 물론 기독교와 무관한 그리스 조각·벽화까지 조직적으로 파괴해 나갔다. 도시에서 떨어진 광야의 사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코노클라시즘은 843년까지 120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때문에 9세기 이전 제작된 프레스코화를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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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기술공사 김재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