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동굴 속의 호머 아르텐스
호머 아르텐스
문명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인간은 언제 영장류에서 갈라져 나왔을까.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자연을 추상화하고 별을 생각하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이러한 물음에는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인간이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종을 유지하는데 있어 그리고 문명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 있어 동굴을 생각하지 않고는 말머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안정적인 동굴에 불과 음식을 저장한 인간은 곧 정교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호머 파베르(Homo faver)로, 삶을 즐길 줄 아는 호머 루덴스(Homo ludens)로,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호머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빠르게 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암벽 앞에서 자신이 본 것을 그리고 있는 인간과 마주치게 된다. 호모 아르텐스(Homo artens), 바로 예술적 인간 말이다.
뼈조각 등 조악한 도구와 물감만을 가지고 그린 동굴 벽화를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수렵채취인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달리는 말과 창에 찔린 수소의 절규, 우아한 곡선으로 처리된 산양의 뿔과 아름다운 선형을 보라. 그 꿈틀거림에서는 동물적인 삶을 청산하고 문화적 도약을 시작한 인간의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대상을 추상화시키다
막스 셀러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라는 책에서 ‘세계개방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짧게 말하면 동물은 환경에 구속되어 있지만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객체로 바라보는 존재이며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이다. 나는 세계 개방성이 예술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본 것을 상징화하여 심상(心象)에 담아두고 동굴 벽면에 재현해 내는 과정에는 바로 대상을 객체로 바라보고 자연에서 벗어난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왜 그렸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이견이 있다. 주술적인 목적이나 사냥 대상을 정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등.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나는 그림의 무용성(無用性)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 반어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풀뿌리 하나 가죽 한 장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무용성의 추구는 배불리 먹고 추위를 피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때가 인간이 문명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벽화의 발견
더욱이 산화철 목탄으로 그린 벽화가 수 만년간 원색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남프랑스의 농페르, 라무트에서도 동굴벽화가 발견되었지만 어느 것도 구석기 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 그림들이 후기 구석기(BC.25000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된 것은 탄소 동위원소법 등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된 최근의 일이다.
그 뒤 구석기시대 벽화가 발견된 동굴은 120개소가 넘는다. 프랑스 베제르 계곡(Vezere Valley)에는 선사시대의 집단거주지와 25개의 동굴 유적이 있다. 여기서는 크로마뇽인 유골을 비롯 끌개나 찌르개 등 생활도구도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뼈를 깍아서 만든 ‘로젤의 비너스’는 유방이나 둔부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다산을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벽화는 BC.18500년경부터 그려졌으며 그림기법이나 채색도구가 시간적 추이에 따라 점차 정교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벽화는 대부분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졌지만 알타미라 벽화는 거의 입구에 몰려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비바람에 손상되지 않은 것은 BC.13000년경 일어난 산사태로 동굴 입구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스코 동굴 벽화
라스코 동굴은 접근이 어려운 절벽에 있어 오랜 세월 동안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입구는 하나로 되어 있으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좁고 긴 여러 개의 방이 나타나며 각 방에는 동물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암벽의 절리나 틈 돌출부 등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동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두 900여점이 넘으며 이중에는 얼굴과 뿔을 비틀림 화법으로 묘사한 들소, 유니콘을 연상시키는 일각수(一角獸), 머리만 내놓고 강을 헤엄치는 수사슴 등이 있다. 비틀림 화법은 대상의 형태보다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그리는 화법이다. 이를테면 머리와 몸통은 측면으로 뿔은 정면을 향하게 하여 강한 인상과 미적인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산족의 암벽화
산(san)족은 우리가 부시맨이라고 알고 있는 남아프리카 부족이다. 이들이 살아온 드라캔즈버그 산맥 일대에는 BC.1000년 이후 최근까지 그려진 많은 암벽화가 분포되어 있다. 이 암벽화는 그동안 수렵채취 생활의 기록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기 위한 샤먼의 도구라는 의견도 있다.
프랑스 동굴벽화가 수만년에 걸쳐 그려진 것과는 달리 산족 암벽화는 최근까지도 계속 그려졌기 때문에 벽화를 그린 목적과 이들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림에는 뿔이 난 사람 또는 동물처럼 움직이는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동물로 분장한 샤먼을 그린 것인데 실제로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산족의 제의에서는 이렇게 차려입은 샤먼을 볼 수 있다.
무엇을 그렸을까
벽화는 대체로 성공적인 사냥과 종족의 번식을 기원하는 것이 많다. 이는 정해진 제의(祭儀)적 공간에 그림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다른 넓은 공간이 있음에도 그림 위에 계속 덧그린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은 동굴 안쪽 깊은 곳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조리나 난방뿐 아니라 조명을 위해서도 불을 잘 다룰 수 있었다는 뜻이다.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황소 말 사슴 산양 노루 등 주로 사냥 대상이었다. 모두 살이 찌고 강한 인상을 주며 암컷보다는 활이나 창에 찔린 수컷을 위주로 그렸는데 아마도 자신들의 무용을 뽐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벽화에는 주술사로 분하거나 사냥하는 인간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산이나 바위 나무 강 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굴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림 자체의 아름다운 선형이다. 일부 그림에서는 단순한 채색이 아니라 음각을 이용하여 부조 형태로 나타낸 것도 있다. 초기에는 동물의 특징이나 형태 위주로 단순하게 그려졌지만 점점 동적인 생동감이 넘치고 명암과 채색이 화려하게 바뀌었다. 이는 벽화가 장기간에 걸쳐 그려졌음을 보여준다.
도료는 어떻게
동굴벽화에 사용한 도료는 시차를 두고 점차 화려하게 변해갔다. 초기 도료는 붉거나 검은 색이 주를 이루지만 점차 노란색 흰색 그리고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된 중간색도 사용되었다. 재료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광물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산화된 망간은 흑회색, 적철토는 붉은색, 회백토는 흰색, 목탄은 검정색, 황토로는 주황색을 표현할 수 있었다.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
생각한다는 것, 그 차이로 인해 어떤 지역에서 한 종이 멸종되면 다른 지역에서 다시 종을 퍼트리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생존해 나갈 수 있었다. 동굴 벽화는 오랜 세월 맹수와 경합을 벌이던 영장류가 마침내 그 고리를 끊고 인간이라는 고유한 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머 아르텐스(Homo artens), 예술적 인간이 탄생한 동굴을 인류 시원의 공간으로 일컫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