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골]부정당이 부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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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골]부정당이 부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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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2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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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를 저지른 저놈을 육시戮屍하고 구족을 멸하라.”

구족,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는 주로 동아시아의 흔한 형벌로 한사람이 잘못하면 본인을 중심으로한 9대에 걸친 직계친족과 4대 방계를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구족의 경우 한 씨족, 집안전체로 대략 수백명에 달한다.

구족을 멸하는 제도는 현대에 와서는 연좌제라는 제도로 계승됐다. 우리나라만해도 1980년 8차 헌법개정 때 사라졌지만, 군사정권 내내 잔재가 남아 납북, 월북자 가족은 공무원은 커녕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도 없었다. 북한은 성문화된 규정은 없지만 한사람이 처형되면 전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고 있다. 장성택 처형때만 해도 친인척 수백명이 숙청당했다.

구시대의 악습인, 구족 멸하기, 연좌제는 그러나 2019년 엔지니어링업계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형벌이다. 허위계약, 담합, 뇌물 등 엔지니어링사업과 관련된 비위행위가 적발되면 각 발주청에서 내리는 행정처분인 부정당제재가 그것이다. 공공입찰이 주된 엔지니어링업계에서 부정당제재는 사실상 사형선고다. 최대 6개월간 입찰참가 제한을 받고 1년간 PQ감점을 받으니 18개월을 허송세월 할 수밖에 없다.

일반인이 보기에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발만 더 들어가보면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감리현장에서 감리단장이 부실한 시공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현시점에서는 감리단장은 단장대로 재판을 받아 처벌을 받고, 회사는 부정당제재를 받아 몇 개월은 입찰에 참가할 수 없게 된다. 과도한 제재의 대표적인 사례인 양벌규정으로 잘못을 한 개인과 이를 관리 못한 회사를 같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회사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개인으로 이뤄진 집단이란 점이다. 1,000명이 근무하는 엔지니어링사 입장에서 단 한명의 비위로 인해 999명이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중국 고대와 북한이 했던 구족을 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다.

어이가 없는 것은 진정한 관리감독 책임자인 발주청은 양벌규정이 아닌 개인처벌에 한정하고 있는 점이다. 관리책임의 죄를 물어 회사까지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사무관 하나만 잘못하면 해당부처 나아가 내각이 총사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위 10위권내 엔지니어링사의 설계 프로젝트와 감리 현장은 수백 곳은 달한다. 이 많은 현장에서 어느 누가 잘못된 생각을 할지 아는 것은, 마치 5,000만 국민 중에 누가 범죄를 저지를 지를 알아내는 것과 같다. 경영자가 신급의 능력을 가져도 힘들다는 것이다.

대안은 글로벌 기준이다. 비위가 발생하거나 부실이 발생하면 개인은 처벌하고, 회사는 계약기준에 따라 설계 또는 감리금액 내에서 배상을 하면 그만이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발주처가 손해를 입은만큼 돈을 내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나 싶다. 전세계 모든 발주처에서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대역죄든 아니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처벌 받으면 그만이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비위로 인해 내 고용의 안정성 없어지고 가정이 파괴되는 양벌규정 부정당제재는 다시한번 재고돼야 한다. 인생이 뽑기는 아니지 않은가. 관치행정, 갑질행정을 위해서는 부정당제재가 아주 편한 규정이다. 발주처 입장에서 조금만 말을 안 듣거나 문제가 생길 때 협박하고 괴롭히기에 이보다 좋은 제도가 없다.

문재인 정부는 고용율과 고용 안정성을 집권 목표로 잡고 있다고 대선전부터 말해왔다. 연좌제 또한 39년전 삭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쯤되면 하나의 잘못으로 여럿이 피해를 입고, 발주처의 책임을 사업자에 미루고, 변호사만 먹고 살기 좋은 부당한 부정당제재는 없어져도 되지 않겠나.

정장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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