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언어영역 1등급 국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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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언어영역 1등급 국토부
  • 조항일 기자
  • 승인 2020.01.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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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일 기자

2020년 경자년 새해가 엿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필자를 비롯해서 벌써부터 많은 혹자들이 스트레스를 한번씩 받았을 것 같다. 매년 하는 신년인사 메시지 때문이다.

“OOO님,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일단 여기까지는 모두가 복사해서 붙여넣기해도 되는데 항상 뒤가 문제다. “작년에도 하시는일 잘되고(또는 돈 많이 버시고) 건강하시고...뭐 이렇게 문자던 카카오톡이던 보낸듯한데 올해도 똑같은 말을 써도 되나”하는 걱정말이다.

사실 건강하고 부자되라는 것 이상으로 좋은 말이 뭐있을까 싶다. 오히려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의미의 단어들을 찾다가 새해부터 오해를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모티콘이라는 좋은 인사법이 있지만 단어들을 공들여 쓴 문장만 하겠나. 용어선택이 가장 중요한 요즘이다.

정부라고 다를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를 앞두고 문장을 수없이 고치고 또 고쳤을 거다. 대통령 신년사에 담긴 메시지는 사실상 한 해 정부살림의 방향인만큼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예의주시하는 이유다.

정부부처 가운데 단어, 용어선택의 중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곳은 어딜까. 국토교통부다. 국토부가 수능 언어영역 시험을 본다면 거뜬히 1등급을 맞지 않을까 싶을정도다.

김해신공항이 대표적이다. 국토부는 지난 3일 발표한 제 3차 항공정책기본계획(2020~2024) 중 김해신공항, 제주 제2공항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사업들에 대해 ‘계획대로 추진’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특히 부산, 울산, 경남 이른바 ‘부울경’ 지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있는 김해신공항에 대해서 ‘국무총리실 검증 결과를 반영해 진행한다’는 별도의 설명자료를 같은날 냈다. 충분히 논란을 의식했다는 증거다.

국토부는 그동안 김해신공항의 추진을 강력하게 밀어부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리실에 칼자루를 넘기며 슬몃 발을 빼는 모습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한발 물러선 국토부’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국토부의 이번 행보를 소극적으로 보고 있다. 과연그럴까.

사실 국토부는 이번 기본계획 수립 전 김해신공항이라는 단어 대신 동남권 신공항이라는 용어로 대체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부산시의 조언을 거부했다. 이미 정부 주요부처에서 김해신공항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인 용어로 정착돼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단어가 향후 5년간 국가 항공정책을 이끌어가는 발표안에 포함돼 있다는게 문제다. 쉽게 뒤집기 어려운 정책안에 고스란히 김해신공항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동남권 신공항 계획수립’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일단 이 문제를 차후로 미룰 수 있었을텐데 김해신공항이라는 용어로 못박으면서 사실상 사업 강행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기본계획이 국토부의 김해신공항을 위한 승부수였던 셈이다.

국토부가 언어술사의 능력을 뽐낸 일이 또 있었다. 지난해 건설업자가 건설사업자로 바뀌는 것을 허락한게 그랬고 용역업자의 용역이란 단어를 엔지니어링으로로 바꾸는데 반대한 것이 또한 그랬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발주처 가운데서도 갑중갑인 국토부가 나서서 그동안 아무런 불편함 없이 하대해 왔던 용역이라는 명칭을 엔지니어링이라는 고급스러운 단어로 바꿔줄리 있을까. 용역을 엔지니어링으로 바꾸면 일어나게 될 이벤트를 국토부는 잘 알고 있다. 언어영역 1등급의 국토부니까말이다.

어찌됐던 국토부의 노력에 하는일은 같은데도 올해부터는 건설하는 사람들 위상은 높아진 것 같고 용역업자 엔지니어들은 퇴보한 느낌이다. 철저하게 신분제도를 만들어내는게 목적이었다면 성공한셈이다. 라디오에서 "대한민국에는 건설업자가 없습니다. 건설사업자가 있습니다"라는 카피 문구를 듣고나니 업자가 아닌 필자에게도 건설사업자들의 위상이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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