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나는 합사가서 엔지니어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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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나는 합사가서 엔지니어 그만뒀다”
  • 조항일 기자
  • 승인 2022.10.27 16:10
  •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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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최근 설계주도형 턴키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현실은 시공사 턴키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턴키사업의 핵심인 합사가 엔지니어 이탈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과거에 비해 근무환경이나 시공사의 갑질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합사를 경험한 이후 회사를 그만두곤 한다. 이에 본지는 합사를 다녀온 엔지니어들의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상을 엿보았다.

(엔지니어링데일리)조항일·김성열 기자=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37분.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밤이 길어졌지만 나의 하루는 지금부터다. 어제도, 아니 불과 3시간여전에 겨우 눈을 붙였으니 피로가 가실리 없다. 대충 눈꺼풀만 떼고 부스스한 머리를 그대로 한 채 출근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명판 하나 없는 강남역 한복판의 7층 사무실. A4용지로 조악하게 적힌 ‘관계자외 절대 출입금지’라고 쓰여있는 이곳이 내가 근무하는 합사다.

사무실 문을 여니 환한 불빛과 함께 곧게 정렬된 파티션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어제의 피로가, 술이 깨지 않아 엎드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수험생을 떠올리게 한다. 공식적인 출근시간은 나인투식스. 하지만 2주 앞으로 다가온 제안서 마감기한으로 나보다 일찍, 아니면 아예 합사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이랬던건 아니다. 오히려 회사에서 간당간당하게 지키던 주 52시간을 칼같이 지켜줬다. 일도 생각보다는 널널했다. 이 바닥에 오기 전까지 들었던 합사에 대한 소문은 괴담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두 달 전부터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퇴근 시간이 9시, 10시로 늘어지더니 이번 달부터는 새벽에도 사무실을 나서는 이가 없다.

한달전에 10분 거리의 모텔을 장기숙박으로 결제했다. 합사에서 집까지는 한시간반여 거리지만 지하철은 끊기고 오가는 택시비 생각하면 인근 모텔을 잡는 게 수지가 맞았다. 이마저도 지원금조차 없는 좋소기업 근로자에게는 사치다. ‘그래도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이고 오지 않았나’ 스스로를 자위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모금과 믹스커피 한잔에 지난밤 못다한 잠을 대신해 본다.

사무실로 들어오니 준비태세라도 걸린 듯 모두가 분주하다. 합사장이 출근하는 9시까지 회의자료를 세팅해야 한다. 너도나도 서류뭉치를 만들기 위해 프린트는 끊임없이 종이를 토해내고 있다.

이제 겨우 7시가 지났지만 바빠진 사무실을 보면서 합사 나오기 수개월전을 떠올렸다. 2년전 결혼할 때 영끌해서 산 아파트 주담대에 작년에 태어난 딸은 대출금리 마냥 쑥쑥 커갔다. 행복했지만 돈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면서 더 벌어보기 위해 합사에 자원했다. 요즘에는 워낙 사람도 없고, 젊은 세대는 이탈이 많아 합사를 안보낸다는데 스스로 가겠다고 하니 회사에서는 기특하다고 했다. 선배들도 요즘 합사가 예전 같지 않고 많이 배워서 몸값을 올려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합사에 지원하면 50만원을 더 얹어준다고 했다. 요즘 최저임금 생각하면 대리운전이나 편의점 알바를 뛰어도 이보다는 더 받겠지만 합사생활은 이러한 선택지조차 없다. 하긴 다른 회사로 간 대학 동기는 회사에서 합사 수당으로 하루 1, 2만원 주는걸로 퉁친다는데 이정도면 감지덕지지 싶었다.

현실로 돌아오니 건너편에 앉은 프리랜서 친구가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경력이 짧지만 소문에 의하면 월 1,500만원을 받는단다. 이것도 경력이 짧아서지 2,000만원 이상 받는 사람들도 많단다. 3개월 바짝하면 내 연봉을 뽑고도 남는다. 물론 합사가 끝나면 손 빨고 있어야겠지만 짧고 굵게 버는걸 좋아하는 전형적인 요즘 친구인 것 같다. 최근에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하는데 젊은 친구라 쿨한 건지, 아니면 합사라서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는 건지 전혀 내색을 않는다. 가정이 있는 내 처지에 프리랜서 선택은 도박이다.

오전 9시. 합사장이 출근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에 따라 임원승진이 달려있는만큼 잠을 설치기는 우리나 그나 마찬가지. 하지만 오늘은 좀 더 예민해 보인다. 아직 막내인 나를 빼고 함께 나온 전무, 이사급 선배들이 회의실로 향했다. 언제쯤 고성이 오갈까 조마조마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잠잠하다. 예민해 보였던 합사장의 모습은 나의 기시감이었나 싶다. 한 두번 위기는 있었지만 오늘 회의는 성공적. 길어진 회의 덕분에 합사에서는 금지된 회사일도 몰래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오늘은 배달앱을 안켜도 될 것 같다.

회의가 끝나고 합사장이 사무실을 떠났지만 예상과 달리 선배들의 표정이 냉랭하다. 경쟁 합사의 제안서가 유출된 건지, 합사장이 단가를 더 낮춰보라는 지시를 내렸단다. 설계변경보다야 낫지만 어쨌던 수정이 생기면 골치아프다. 보안이 생명이라 요즘에는 금액이 큰 사업일수록 미끼용 제안서도 만든다는 소문이 돌던데 합사장의 정보망이 진짜던, 낚시던, 우리의 마감 시한은 변하지 않는다.

당장 다음주 월요일 회의까지 수정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오늘은 금요일이다. 집에 가지 말라고는 안 했지만 주말 내내 여기서 일이나 하라는 뜻이다. 이대로면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말까지 2주 연속 집에가는 건 나가리 된듯 싶다. 이제 겨우 아이컨택을 해가는 두 살배기 딸아이에게 아빠가 아닌 아저씨가 되가는게 아닌지 서글픔이 차오른다. 한껏 돌았던 입맛이 싹 가셔버렸다. 오늘도 느즈막히 샌드위치로 끼니를 채운다.

어느덧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일을 미뤄봤자 미래의 나만 고달플 뿐이다.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휴대폰에 저장된 노동요를 틀었다. 두 시간여가 흘렀을까. 함께 합사에 근무하던 옆자리 타사 직원이 무언가를 들고 상사에게 향한다. 사표였다. 나보다 경력은 아래였지만 나이는 네 살이 많아서 형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프로젝트 2주를 남기고 그만두겠다 얘기하니 타사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자리에 돌아온 그에게 결과를 물으니 “프로젝트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더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친구는 이번 합사를 끝으로 탈토 할 결심이 섰다는 것을.

오후 6시 33분. 저녁은 제대로 챙기자는 전무의 말에 모두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워낙 빡빡했던 하루에 아침 담배를 끝으로 12시간 만에 첫 하늘을 바라봤다. 어둑해진 하늘에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린다. 저녁 메뉴는 부대찌개. 3일 만에 밥다운 밥이다. 썩은 동아줄마냥 간당거리던 나의 멘탈을 국물 한숟가락과 반주 한잔이 부여잡아 준다.

식사를 하던 중 갑작스레 전무에게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 합사장과 함께 파견된 시공사 대리다. “지금 어디냐”고 스피커 넘어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날카롭다. 점점 굳어져가는 전무의 표정에 저녁밥이 얹힐 것만 같다. 식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복귀한 사무실에는 시공사 대리가 합사장실에 앉아있다. 그리고 오전 회의 때처럼 전무와 이사들을 불러모은다. 얼마 뒤 시공사 대리의 고성이 새어 나온다. 위에서 지시를 한건지 군대의 내리갈굼 마냥 배 이상 살아온 선배들을 군기잡는다. 요즘에는 시공사 갑질이 거의 없다는데 역시 그런건 다 남들 얘기인 듯 하다.

어느덧 시간은 9시 58분. 시공사 대리와 한바탕 전쟁을 끝내고 좋게 좋게 돌려보낸 전무 가 약을 꺼낸다. 경력 차이는 물론 나이도 2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옛사람답지 않게 꼰대 기질이 덜하다. 사석에서는 선배라고 부르라며 나름 속 얘기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일적으로 존경심도 있었다. 선배가 합사PM으로 나간다고 해서 자원한 것도 있었다. 이런 사람 좋은 전무가, 수십번을 합사에 나갔을 선배가 6개월 전부터 약을 먹고 있다.

지난번 턴키합사에서 지독한 합사장을 만난 탓이다. 술 결제는 기본이고 알아주는 골프광이라 일주일에 한번은 사비를 털어 라운딩을 데리고 나가야 했단다. 새벽 2~3시에 전화해 합사로 나오라 하면서 1대1 갈굼도 허다했다. 지금도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나는 선배는 결국 정신과 상담 후 약을 먹고 있는 것이다. 선배가 안타까워 보인다는 생각도 잠시,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내 미래가 저 모습일까,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당장 처리해야할 일이 많았다. 결국에는 제안서를 마감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 아니, 이번 프로젝트를 끝으로 나도 탈토를 해야하나 정신이 혼미해진다. 책상에 붙어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사진을 보고 겨우내 마음을 부여잡았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합사에 자원한 순간이었을까, 엔지니어링사 입사를 선택했을 때, 토목과를 간다고 했을 때인지. 머릿속이 하얘진다.

차로 건너편에 기라성처럼 늘어선 술집들이 LED 조명을 내뿜으며 거리의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 이곳과 저곳의 현실이 뒤틀려 있는 듯 하다. 저들의 불금이 화려하게 빛날수록 내가 서 있는 합사의 밤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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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인간이냐 2023-09-13 15:49:13
보고를 위한 보고서..일이 일을 만드는 기형적인 변태 한국 업무 문화

턴키망 2022-12-15 09:47:52
지난번 턴키때 부서 3명 퇴사.
이번 턴키때 명명이나 퇴사할까?

모 회사에서는 턴키 나가라고 하니 팀 하나가 퇴사했다던데
어차피 개고생하고 갑질당할거 당연하니 이게 맞는거 같기도 하다.

김성진 2022-11-19 16:24:59
이게 나라입니까???
연봉 인상율보니까 노답이던데 참....
https://m.blog.naver.com/yaneogun/222927699152

도동탁 2022-11-19 10:42:05
설계사 다니면서 합사경험 해보고 시공사 옮겨서 합사경험 중인데
어줍짢은 시공사일수록 갑질 심한거 같아여,, 메인 시공사 아저씨들은 되게 양반들이던데

나라장터 2022-11-10 17:02:06
기라성은 일본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1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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