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장들의 나라, 설자리 없는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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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들의 나라, 설자리 없는 엔지니어
  • 정장희 기자
  • 승인 2012.06.22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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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 SOQ 시행 3년째 남은 건 ‘발주청 비대화’
PQ세부평가기준 삭제시, 대형사 중심 시장돼
 
#1. C엔지니어링, K모 본부장은 2000년에 철도기술사를 획득했다. 당시 철도기술사는 80여명에 불과했고, 공사공단 출신을 제외하면 일반 엔지니어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격증이었다. 오직 실력만으로 철도기술사를 딴 K본부장은 세상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사공단 출신이 아닌 일반엔지니어는 PQ세부평가기준 상의 만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낙심했다. K본부장은 철도엔지니어로 20년째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철도공단 과차장급 정도의 실적만 쌓은 상황이다. 같은 나이, 경력의 공사공단 출신 PQ만점자만 보면 엔지니어 출신인 자신이 한심하다.  

 #2. E엔지니어링 J상무는 며칠째 철야를 하며 TP를 작성하느라 피로가 극에 달했다. 물론 주관적이지만 이번 TP는 창의적인 설계로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공사비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TP에서 1위를 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경쟁사에서 발주청 고위직 인사를 영입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TP 제안서 만드느라 2,000만원을 썼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날릴 것 같아 팀원과 회사에 미안하다.

 #3. 대형사로부터 설계하도를 받는 S사장은 요즘 원도급사의 단가인하 압박에 피가 마른다. 기본적으로 기존단가에서 할인하고 나머지 도급가에서 15% 가량을 비자금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자금은 발주청 로비비용과 회계처리가 어려운 발주청 출신자의 임금으로 사용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술력은 자신 있어 원도급자로 활동하고 싶지만, 실적이 없어 불가능하다. 발주청 출신을 영입하고 싶지만 현재 직원들 월급도 잘 못주는데다, 관출신이 실적도 없는 회사에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어 더 우울하다. 

기존 PQ방식이 변별력이 없다는 이유로 2009년 건설산업선진화방안을 통해 시행된 TP(기술제안), SOQ(기술자평가)의 폐해가 엔지니어링업계에 가중되고 있다. TP, SOQ는 발주청 관계자가 주 평가위원으로 위촉돼 정성적으로 평가한다. 때문에 발주청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발주청이 낙찰자 선정의 키를 쥐게 되자 업계는 로비에 나서게 된다. “수주금액에 5~10%는 리턴을 해주는 게 관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여기에 퇴직자에 대한 전관예우가 대폭 강화됐다. 당장 일정등급 이상의 전관을 영입할 경우 굵직한 몇 개 사업을 몰아주는게 당연시됐다. “한국사회가 인정에 좌우되는 만큼 ‘같이 일한 동료’에 대한 보상이 알게 모르게 이뤄지고 있다.”
 
전관영입이 곧 수주로 연결되면서 그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최근 발주가 큰 폭으로 늘었던 철도분야의 경우 공단출신 PQ만점자는 ‘부르는게 값’이다. 동년배 엔지니어의 2~3배의 연봉에 부사장 이상의 직급 그리고 법인카드와 차량이 제공되고 있다. 물론 발주가 턱없이 줄어든 도로분야는 대우도 높지 않고, 부르는 곳도 많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TP, SOQ 시행이후 전관예우가 극에 달하고 있다. 한국의 엔지니어링 임금수준이 선진국에 견주어도 높은 이유가 전관에 대한 비용 때문”이라며 “건설관련 법령을 살펴보면 입안자인 공무원이 공무원에게만 유리하게 법령을 만들어내고, 엔지니어링산업 발전은 뒷전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PQ예시기준 삭제시, 전국이 로비판 돼
 
최근 국토부는 TP, SOQ의 문제점을 인식해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도로, 철도분야에서 절반가량 발주되는 물량을 30% 수준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이와함께 설계보상비도 책정하고, 평가위원을 공개하는 등 나름대로 생색은 갖췄다.
 
하지만 업계는 개선안이 실효를 거둘지 의문이라는 반응이다.
 
L엔지니어링 관계자는 “국토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각 발주청에서 TP, SOQ를 줄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라며 “발주청 입장에서야 정성적 평가가 줄어들어도, PQ기준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권한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정부, 공무원 세계라는 부처님 손바닥안에서 엔지니어링업계가 놀아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라고 지적했다.
 
10~50위권내 중견엔지니어링사의 경우 TP, SOQ 축소보다, PQ세부심사기준 강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현재 도로 등 범용화된 분야의 경우 변별력 확보 차원에서 정성적 평가를 들여왔지만, 항만, 조경, 도시계획, 상수도 등은 PQ평가만으로 낙찰자를 선정하고 있다.
 
문제는 평가세부기준 자체가 신규사나 중견사는 절대 진입할 수 없도록 상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부평가기준 자체를 삭제할 경우 각 발주청마다 상이한 기준을 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전국의 발주청을 대상으로 한 로비가 극심해진다는 지적이다.
 
즉 현재는 지역업체가 각 지자체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평가기준을 마련해 대형사와 컨소시엄을 맺는 형태로 사업이 진행된다. 때문에 평가기준 삭제시 지역업체 입장에서는 실적이 높은 대형사 기준에 맞추는 것이 낙찰확률을 높일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TP, SOQ 확대는 중앙정부 전관에게 이점이 있고, PQ기준 삭제 즉 자율화했을 경우 전국 모든 발주청이 로비대상이 될 것”이라며 “대형사 입장에서는 제안비용을 들이지 않고 PQ기준을 강화해서 독점적 구조를 가져가는 방법을, 중견사는 진입장벽을 허물기 위해서 전관을 이용하더라도 TP, SOQ를 존치하고 PQ예시기준을 삭제하지 않는 방안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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