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은 엔지니어링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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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엔지니어링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 도시였다!
  • 이명주 기자
  • 승인 2012.10.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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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엔지니어링 산업은 1973년 기술용역육성법이 제정되면서부터 본격화되어 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양식 엔지니어링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엔지니어링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였으며 이를 실천해왔다.

그 중 가장 체계적이고 현재와 같이 계획적인 경우를 꼽는다면 바로 조선의 500년 도읍인 한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도시발전을 위해서는 토목 공사가 필요했던 만큼 엔지니어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도읍을 옮기기 위해 도시계획을 세우고 기본설계와 세부설계를 실시한 한양이 최초라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본지에서는 우리 엔지니어링산업의 근간을 알아보는 동시에 현재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을 다시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동국여도 도성도

▶ 한양 도읍 프로젝트, 발주자는 태조 이성계, 타당성조사는 무학대사, PM은 정도전

현재 도시계획 엔지니어링 사업을 실시할 때 순서는 타당성 조사, 기본계획, 기본설계, 상세설계가 가장 큰 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 증가에 따른 자연적 도시형성이 주를 이루어 왔다.

일부 고대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 같이 대규모 도시계획을 통해 도읍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로마도 자연적 성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런던도 로마제국의 전방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장했듯 상당수의 도시들은 자연적 성장에 의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생성된 계획도시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일부에서 있었던 남경 천도 주장에 따른 영향으로 일정부분 도시의 기틀을 잡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양이 도읍으로 본격적인 성장한 시기는 조선 건국이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대도시로 선정됐다.

이에 강성한 왕권과 새로운 정권창출을 나타내기 위해 현재 도시계획과 같은 짜여진 도시계획 형태로 만들어진 도시가 됐다.

물론 고려말 남경으로 정해지며 도읍 천도 움직임이 있었긴 하지만 한양이 지금 서울의 기틀을 잡은 것은 조선왕조의 시작과 함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양을 처음 도읍지로 정한 것은 무학대사의 의견이 받아들여짐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시작으로 정도전이 도읍 천도를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엔지니어링 시스템과 비교해 보면 태조 이성계는 발주처, 무학대사는 타당성조사를 정도전은 PM(Project Management)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지금의 여건을 대입해보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4륜구동 차를 타고 미개발 택지를 직접 돌아보며 입지조건과 타당성을 확인했으며, 정도전의 경우 안전모와 안전화 도면을 들고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아무튼 이 세사람의 역할이 역할이 맞물리며 한양은 600여년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 도읍으로써 자리를 매김하게 됐다.

 

▶ 한양은 정궁과 인구 10만여명이 공존할 수 있는 신도시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은 풍수지리는 물론 지리적 요충지로 수도가 갖추어야할 조건을 충실히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고려왕조를 끊고 조선왕조의 옹립 당위성을 위한 정치적 조건 또한 갖춘 안성맞춤 도읍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개발 도시인 만큼 갖추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정도전 성리학과 풍수지리학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도시개발 계획을 시행하게 된다.

그가 구상한 한양 개발 사업을 살펴보면 우선 도읍지인 만큼 왕이 살 수 있는 대규모 궁궐과 관리들이 직무를 볼 수 있는 관청지역, 인구 10만여명이 거주할 수 있는 주거단지로 크게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 초기 인구가 400만-50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한양의 규모는 지금의 100만명 이상의 인구 수준으로 환산할 수 있으며 이는 광역시급 정도가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울러 도읍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 경기도와 한양을 구분하는 도성과 이를 연결하는 4대문과 4소문 또한 한양 개발에 청점을 찍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이 구상한 한양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정궁인 경복궁의 크기는 43만2,703㎡ 수준이며, 밖으로는 10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거주지역과 관아가 있는 육조거리가 구분되었으며 이를 둘러싼 도성내부는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분할해 약 16.5㎢에 달하는 한양을 완성했다. 이는 현재 서울의 약 1/20 수준이다.

▲ 경복궁 근정전

물론 도성밖 10리(4km)까지는 성저 10리라 부르며 한성부에서 한양의 일부로 관리해 실제 범위는 현재 서울의 1/5 수준까지 확대시켜 볼 수도 있다.

▲ 초기 한양 지도


▶ 계획도시 한양, 우리는 이미 엔지니어링을 알고 있었다

한양은 어찌보면 지금 서울의 수준과 비교해 그 규모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아울러 로마와 같은 상하수도 시설과 화려한 궁전 같은 문화유산은 없다.

하지만 600여년전 유래 없는 계획 신도시가 생겼다는 점과 현재 세계적 대도시인 서울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또한 엔지니어링이 그동안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기술이라고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엔지니어링은 이미 우리의 윗 세대부터 DNA에 잠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인구 중 1/4인 1,000만명 이상이 서울과 주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해 실제로 이를 자각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 중 엔지니어링 업계 종사자들의 경우는 또한 얼마나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서울의 유적지를 찾아가며 역사 유물과 이들이 포함한 엔지니어링 마인드가 무엇인지 찾아보며 필자를 포함한 독자와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되짚어가는 동시에 함께 알아가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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