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놀라운 두루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혜초가 쓴 왕오천축전이라고 주석이 달린 이 문서는... 1908년 봄, 펠리오(P.Pelliot)가 프랑스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흥분이 느껴진다. 왜 아니겠는가. 1200년, 오랜 세월 석굴에 묻혀 있던 문서가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종교와 동굴의 밀월은 언제부터였을까. 문학의 고전이 된 ‘희랍인 조르바’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오랜 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는 현자의 거처는 거의 동굴이다. 불교 기독교 힌두교를 넘나드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도 동굴은 종교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간이다. 이슬람의 마호메트가 신의 계시를 받는 곳도 역시 동굴이 아닌가.하긴 신과 소통하려는 이에게 동굴만큼 정적인 환경을 갖춘 곳이 또 있을까. 그래서인지 20세기 손꼽히는 경전은 모두 동굴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쿰란의 사해문서, 이집트 나그함마디의 도마문서, 둔황의 불교 경전 등. 그리고 지금도 ‘유다의 황야’로 불리는 사해 주변에서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270여개의 동굴에서 수도승의 흔적을 쫓아다닌다. 사해뿐 아니라 중국의 용문과 운강, 터키의 카이마클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명의 관점에서 오랜 세월 예술과 종교 철학의 산실이었던 동굴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인간이 처음 동굴에 들어온 것은 맹수와 추위를 피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길로 들어선 뒤에는 주거에서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쓰임이 다양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종교적 성찰이 아닐까 싶다. 이들의 고독한 삶과 흔적은 종파를 초월하여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중국의 3대 석굴사원
돈황(敦煌)과 운강 그리고 용문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석굴사원이 있다. 돈황은 서부 사막에 운강과 용문은 중부 섬서성과 하남성에 있다. 거리상으로는 꽤 떨어져있지만 모두 비단길로 연결되는 고대 통상로의 요충지다. 그 덕분에 세 곳은 서로 문물을 교류하며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형태나 규모 예술적 가치를 보면 석굴마다 나름대로의 특징과 차이가 있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은 북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4년 이후 조성된 것이다. 3대 석굴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예술성도 뛰어나다. 이하강변 암벽 13km에 동굴을 뚫고 10만점이 넘는 불상과 탑을 만들었는데 역시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천정화가 부조된 고양동, 80만명이 동원된 11기의 거대불상, 측천무후가 모델이라는 비로자나불, 연꽃 천장화로 유명한 연화동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 개의 석굴 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것은 단연 돈황이다. 석굴 자체는 두드러진 형식이나 계획 없이 벽면에 숭숭 뚫려져 있다. 형태도 소박해서 그 자체로는 운강이나 용문석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돈황을 중국의 대표 석굴사원으로 꼽는 것은 왕오천축전을 비롯하여 고대 문화교류를 파악할 수 있는 많은 벽화와 사료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돈황의 역사
돈황은 내륙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만 중국이 5호 16국으로 분열된 5세기에는 서량(西涼)의 수도이기도 했고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隨), 당(唐)대에는 문화 경제적인 중요 도시로 각광 받았다. 그러나 돈황을 거쳐 가던 비단길이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북로로 바뀜에 따라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청조 말 영국인 오럴 스타인(Aurel Stein)이 방문했을 때는 거의 유령도시가 되어 있었다.
만들어진 과정과 형태
가장 오래된 석굴은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이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6세기 이후 수·당 시기에 만들어졌다. 나머지 역시 이 시기의 것을 개조하거나 확장한 것이다. 이후 몽고 침략으로 도시가 황폐화되고 오랜 세월 이슬람 지배로 불교가 쇠퇴하면서 돈황은 서서히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비단길의 주경로가 천산북로로 바뀐 것도 영향이 컷을 것이다.
석굴 형태는 크게 예배굴과 참선굴로 나뉜다. 예배굴은 모여서 예불을 드리던 곳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불상이나 벽화는 거의 이곳에 있다. 이에 비해 수수해 보이는 참선굴은 개별 수도공간이다. 작은 방이 딸려있어 주거기능도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에는 불교 흔적이 거의 없는 석굴이 몰려 있는데 이곳은 일반인 또는 장인들이 머물던 주거지역이었다.
프레스코화와 시멘트
돈황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벽화는 프레스코(Fresco) 화법으로 그려졌다. 이즘은 시멘트가 도시 미관을 해치는 천덕꾸러기로 폄하되지만 시멘트만큼 오랜 세월 인류문명에 기여한 재료도 없을 것이다. BC.3000년 피라미드 줄눈에 사용된 뒤부터 미케네의 아크로폴리스, 미노스의 물병, 로마의 판테온에 이르기까지 쓰임의 예는 끝이 없을 정도다.
프레스코화는 습식과 건식이 있다. 화판이 축축할 때 그리는 것을 습식(Buon Fresco), 어느 정도 굳은 뒤 염료에 점착제를 섞는 것이 건식(Secco Fresco)이다. 돈황 벽화는 모두 건식으로 석가 일대기와 다양한 일화가 이 방법으로 그려졌다. 불상을 비롯 조각에 수놓인 화려한 채색 역시 프레스코 기법이다. 돈황 문서가 대부분 반출된 반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돈황 문서
사용된 언어만도 한문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시리아어 등 10여 개가 넘는다. 같은 경전을 다른 언어로 적은 것도 있어 고대어의 로제타석이 되기도 한다. 문서가 만들어진 시기는 359~1002년인데 이는 5호 16국에서 남북조, 수, 당, 송의 치세에 이른다. 제국의 흥망이 거듭되는 동안 문서가 만들어지고 그 뒤로 다시 굴속에서 천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서가 발견된 1900년경 혼란의 와중에 있던 중국은 멀리 떨어진 돈황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이 틈을 타 문서는 대부분 해외로 빠져 나갔다. 특히 희귀성이나 중요성이 큰 문서는 선별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미국 등으로 반출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유물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많이 파손되었다.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