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카파도키아, 중세의 암벽사원
상태바
<특별연재>카파도키아, 중세의 암벽사원
  • .
  • 승인 2013.09.04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선포한 밀라노칙령으로 모든 종교는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억압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자유는 아주 낯설었다. 순교 기회를 잃어 허탈해진 이들은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하거나 고행을 통해 구도에 이르려 하였다. 카파도키아 광야를 가득 채운 암벽사원, 그것은 굴레를 벗어난 이들이 다시 스스로를 가두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무희 타이스(Thais), 그녀의 이름 뒤에는 알렉산더의 정부, 파라오의 왕비, 멤피스 여왕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그저 매춘부로 그려지지만 프랑세(A.France)의 소설과 마스네(J.Massenet)의 오페라에서는 순결한 성녀로 그려진다. ‘타이스의 명상곡’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2010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춤출 때 연주되던 애끊는 바이올린 곡 말이다.
소설 ‘타이스’는 종교적 염원과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수도사 파프뉘스는 뛰어난 언변으로 무녀 타이스를 교화시킨다.

▲ 오페라 ‘타이스’의 한 장면
둘은 함께 광야로 떠나는데 고행의 과정에서 서로 깊은 연민에 빠진다. 파프뉘스는 결국 ‘천국 같은 건 없어, 오직 사랑 뿐...’하고 외치며 타이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오랜 광야생활에 지친 그녀는 파프뉘스 앞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다.
타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광야의 사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카파도키아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석굴과 암벽동굴을 보면 조금쯤 그들의 처지를 엿볼 수 있다.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절벽에 사원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수도생활은 그 자체가 죽음과 싸우는 일이었다. 신을 향한 염원, 그들의 열정 앞에서 우리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명상에 이르게 된다.
 
카파도키아의 역사
▲ 아나톨리아 고원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에서 아나톨리아(Anatolia)로 불렸던 지중해 동부 고원은 소아시아 문명의 발상지인 카파도키아와 차탈휘위크를 품고 있다. 이곳에서는 9000년전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7600년전 유적에서는 벽난로 화덕을 갖춘 집과 곡물이 발견되었다. BC 3000년경부터는 히타이트, 프리기아 리디아 등 많은 세력이 흥망하며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했다.
작은 왕국에 불과했던 메디아가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배경에 소아시아라는 수준 높은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르시에스(Erciyes)산의 분출은 아나톨리아 고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곳의 농경문화가 화산재로 인해 비옥해진 토지 덕이었다면 기암지대와 협곡 그리고 다양한 지하공간은 용암으로 인한 특이지층 때문이다. 충적사암층을 단단한 용암층이 덮으면서 구조적으로 안정된 지붕 역할을 해준 것이다.
아나톨리아 고원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길목이었다. 그 덕에 카파도키아는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BC.3세기까지 로마의 동맹국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에는 괴레메 석굴, 카이마클리 지하도시, 암벽사원 등 지하공간과 관련된 세계문화유산이 많다. 이는 거대세력이 피고 질 때마다 삶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의 뼈아픈 흔적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배경과 규모

▲ 괴레메 사원 및 주거동굴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사원을 만들었을까. 외부침략을 피하기 위해 만든 지하도시나 동굴주거와 달리 암벽사원은 거의 신앙을 향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사원은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높은 곳을 선호하긴 했지만 이는 신과 가까워지려는 상징적 이유였을 뿐이다.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의 안정으로 외침의 문제는 크지 않았던 듯하다.
암벽교회는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종교자유가 선포되자 기독교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 무렵 카파도키아 대주교였던 바실리우스(329~379)는 세속에서 벗어난 수도를 강조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광야로 떠난 수도자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수도자가 몰리자 동굴은 층층이 만들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암벽을 파내는 작업은 더 힘들었지만 이 정도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의 억압이 사라졌을 때 오히려 순교의 기회를 잃었다고 슬퍼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긴 했지만 이들의 삶은 20세기 초까지 근근이 이어졌다.

일라라(Ihlara) 계곡

▲ 일라라 계곡 암벽사원과 내부
일라라는 수억 년의 침식이 만든 거대한 협곡 지대다. 높이 150m에 이르는 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뻗어 있으며 절벽 중간에 쳐다보기도 아찔한 동굴이 있다. 이 절벽에는 약 100여 개의 사원이 있는데 4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내부는 미사를 위한 공간과 주거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초기 사원은 내부벽화나 시설이 거의 없지만 후기로 갈수록 규모도 커지고 점점 정교해졌다. 일라라 유적의 특징은 접근이 어려운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암벽동굴은 비교적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위를 파내는 기술은 물론 정이나 곡괭이 외에 쓸만한 도구도 없었던 수도자들이 이를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괴뢰메(Göreme) 사원

▲ 괴레메 사원(좌), 돔사원 프레스코화(우)
카파도키아의 1000여 개 암벽사원 중 400여개가 괴뢰메 국립공원에 있다. 벽이나 천정에 그려진 벽화는 거의 모두 프레스코화지만 사원의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단순히 방 한 칸으로 된 기도실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큰 공간을 갖추거나 십자형태로 지은 곳, 반원형 돔으로 된 곳도 있다.
비록 동굴이긴 하지만 우아한 돔과 화려한 색채는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규모가 큰 정방형 사원은 정교한 실내장식을 갖추고 있다. 6세기경 만들어진 토칼리 사원이 이에 해당한다. 가장 흔한 형태는 방 하나로 된 예배실이다. 입구에는 작은 공간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수도자가 만든 자신의 무덤이다. 결핍과 고독을 견디며 신과 소통하려던 이들은 이렇게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

파샤바(Pasabag)의 버섯동굴

▲ 바샤바계곡 버섯동굴(좌), 사원 내부(우)
당시 광야에는 두 부류의 수도자가 있었다.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부류, 바실리우스를 따르는 이들은 큰 사원을 만들고 여럿이 함께 생활했다. 반면에 안토니오를 따르는 이들은 인간을 벗어나 홀로 은둔할 때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파샤바 계곡의 작은 버섯동굴은 주로 이들의 공간이었다.
계곡에는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기묘한 바위로 가득 차 있다. 버섯기둥을 연상시키는 이 바위들은 사암위에 용암이 덮인 뒤 오랜 세월 아랫부분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5세기경의 성시몬 사원은 버섯 3개가 함께 자라는 듯한 바위에 있다. 내부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버섯기둥 형태로 볼 때 더 크게 만들 수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에게 불편을 견디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었으니 말이다.

이코노클라시즘(Iconoclasism)의 성화 파괴

▲ 훼손된 성화
탈레반 집권 당시 간다라 미술의 결정체였던 바미얀 석불이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파괴되자 세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종교의 편협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사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카파도키아 암벽사원의 프레스코화가 파괴된 것 역시 교리를 둘러싼 사소한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성상파괴주의로 불리는 이코노클라시즘은 725년 레오 3세의 예수상 파괴로 시작되었다. 이후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를 이유로 성화나 조상은 물론 기독교와 무관한 그리스 조각·벽화까지 조직적으로 파괴해 나갔다. 도시에서 떨어진 광야의 사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코노클라시즘은 843년까지 120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때문에 9세기 이전 제작된 프레스코화를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살았을까.
▲ 암벽사원 주변의 비둘기집
아무리 둘러봐도 바위산뿐이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바람이 분다. 나무는 고사하고 풀이 자랄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으로 추위를 가리고 먹을 것을 얻었을까. 아무리 궁핍을 견딘다고 해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
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암벽사원 입구에는 여러 개의 홈이 있는데 이것은 비둘기집이다. 수도자들은 홈을 파서 비둘기가 날아오도록 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이들에게 비둘기는 아주 요긴한 식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도자의 궁핍이 어느 정도였는지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비둘기 몇 마리가 줄 수 있는 고기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그나마 여럿이 함께 생활하던 사원은 사정이 좀 나았다. 그들은 수도와 노동을 병행하며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때로는 도시에서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홀로 은둔하던 수도자의 사정은 훨씬 어려웠다. 거적이나 다를 바 없는 옷 한 벌 그리고 척박한 땅에서 얻어낸 곡식 몇 알갱이에 의지해 평생을 보냈으니 말이다. 많은 수도자의 사인이 영양부족 때문이었다는 것은 실상을 잘 말해준다.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