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고난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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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고난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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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6.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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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에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답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뿐이라고 말한다. 성서는 신앙 하나면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사랑·희망·신앙... 지하도시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우리는 다시 삶의 극한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물음과 마주치게 된다. 데린쿠유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부족함이 없다.

종교박해가 극에 달했던 데시우스 황제 시절 일곱 명의 젊은이가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잠에 들어 187년간이나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445년, 마침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빵을 사려고 내민 동전은 이미 통화가치를 잃어버렸고 로마는 전염병과 이민족 침입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 누구도 종교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이 일화는 동굴에 묻혔다가 살아난 예수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거로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당시 사람들은 어두운

▲ 데린쿠유 내려가는 계단
동굴 속에서 187년이나 살아왔다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동굴 속에서 잠들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 게 아닐까. 어쨌든 종교탄압과 동굴의 삶은 보르헤스가 쓴 ‘아베로에스의 추적’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깨어 있었다. 깨어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결혼과 출산 등 인간의 삶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인 집회와 세례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굴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라 주거의 기능을 모두 갖춘 하나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쟁이나 재해를 피해 얼마간 동굴에 숨어살 수는 있다. 그러나 SF도 아니고 어떻게 수천명이 도시를 이루며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었을까.

지하도시의 배경과 규모
데린쿠유(Derinkuyu)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이다.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큰 지하도시인 이곳은 1960년 닭을 쫒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후 비슷한 지하도시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40여개나 된다. 데린쿠유는 깊이 55m 20층의 주거공간까지 조사되었으며 깊은 곳까지 맑은 공기가 닿을 수 있게 40m 깊이로 환기구를 만들어 놓았다. 시설규모로 보아 약 8천명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 이렇게 많은 지하도시가 만들어졌을까. 자연환경과 외부침략이라는 두 요인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카파도키아 일대는 여러 암층이 얽혀 있고 또 파내기는 쉽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굳어져가는 응회암 지층이 많다. 이것이 자연적인 이유라면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거대세력이 휩쓸고 간 광풍의 역사는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 에르시에스산
자연조건은 선사시대부터 계속된 화산활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카파도키아에는 대규모 기암지대가 많은데 이는 에르시에스(Erciyes)산의 분출 때문이다. 용암과 화산재 충적층은 적갈색 흰색 주황색 등 서로 다른 지층을 만든다. 이러한 지층변화는 지하공간을 만들 때 아주 유리하다. 예를 들어 응회암층을 파내면 그 위쪽의 단단한 용암층이 자연스럽게 지붕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가 이스탄불은 유럽에 나머지는 아시아에 걸쳐있는 것처럼 카파도키아도 과거에는 유럽과 아시아 틈에 끼어 있었다. 이곳은 주요한 고대 통상로로 BC 3세기경에는 아바노스(Avanos) 위르굽(Urgup) 등 여러 왕국이 자리 잡은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때문에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등 거대세력의 패권이 바뀔 때마다 온 몸으로 전쟁의 광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 데린쿠유 지하도시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동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데린쿠유처럼 평지에서 아래로 파내려간 지하도시, 바위산을 옆에서 뚫어 만든 괴레매 동굴주거지, 깍아지른 절벽 중간에 지은 동굴교회 등. 이러한 동굴이 상당 부분 침략과 도피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선사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이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수렵 채취기인 4000년 이전으로 보인다.

데린쿠유에서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독수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BC.18세기 이 지역을 지배하던 히타이트의 유물이다. BC.401년 크세노폰이 쓴 아나바시스(Anabasis)에는 프리기아인이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프리기아인은 히타이트와 비슷한 시기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다. 누가 만들었든 오랜 세월동안 조금씩 확장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시기의 유물로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응회암은 석기나 뼈조각 등 단순한 도구로도 쉽게 파낼 수 있다. 그래서 추위와 맹수를 피하기 위한 동굴이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평면 근처에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겠지만 이후 광야로 쫒겨온 기독교인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종 완성된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처음에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점차 연결통로를 확장하여 주변에 있는 지하도시와 소통하기도 했다.

▲ 수직갱
변변한 측량도구도 없던 시절 도시간 연결통로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사막의 지하수로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수직갱을 이용했을 것이다. 두 도시 끝에 수직굴을 파고 땅위에서 마주 보도록 막대를 놓는다. 그리고 수직굴 아래도 같은 방향으로 막대를 놓고 뚫어 나가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하도시 곳곳에 있는 수직갱은 환기와 햇빛을 받아들이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하도시간 연결 작업에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하도시의 삶
지하도시에는 지상에서 필요한 시설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다. 방이나 부엌 외양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간은 물론 학교나 세례 제의를 위한 집회시설, 곡식이나 포도주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긴 죄수나 격리가 필요한 사람을 가두어 놓은 흔적도 있어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 외부침입 방지돌
이외에도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저장소, 환기시설, 매장공간도 보인다. 외부침입에 대비해서 통로 중간에는 비상 차단용 돌을 배치하였다. 이곳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좁게 만들었다 아무리 많은 적이 침입해도 일대일로 저항한다면 해볼 만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들이 수백 년간 계속 땅속에서만 산 것은 아니다.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려면 지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동굴 안에 웬만한 주거기능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적의 위협이 없는 평시에는 지상으로 나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면서 지하도시에 식량을 공급한 것이다. 저장 공간에서 발견된 밀이나 포도주 그리고 교역을 통해 얻은 직물 그릇 제의도구는 지상과 지하생활을 병행하던 이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어둠을 극복한 사람들

▲ 데린쿠유 내부
생활공간과 물자를 갖추었다 해도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지하에서 버텨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침략과 학살의 공포를 피해 일단 동굴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 곳에서 장기간 버티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 어둠과 폐쇄로 인한 공포는 육체적인 공포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연구 자료에는 지하생활을 견디지 못해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좀 넓은 공간에는 중앙에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어떤 기둥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것은 밧줄이나 사슬로 정신질환자를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침략의 광풍이 지나간 뒤 지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어둡고 좁은 지하생활로 인해 곱추나 기형이 되었으며 햇빛 때문에 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잘 느껴지는 기록이다.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기독교에서는 지하도시의 삶을 신을 향한 염원과 신앙의 결정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선택이 아니라 학살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임은 자명하다. 정복자의 입장에서 피정복자의 종교나 문화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노예로 부릴만한 가치가 없으면 무차별 학살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겠지만 데린쿠유는 바로 그 고난한 삶을 보여주는 흔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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