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는 살찐 암소들이 강가에서 노는 꿈을 꾸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야윈 암소가 살찐 암소를 모두 잡아먹는 것이었다... 유대인 요셉이 이를 풍년 뒤에 흉년이 올 것이라고 해몽하자 파라오는 그를 총리로 삼았다. 요셉은 많은 곳간을 만들어 이집트를 가뭄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쟈스민 혁명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의 정변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평온하던 무슬림 국가에서 왜 이런 혼란이 일어났을까. 어이없게도 그 발단은 밀 수급의 일시적인 불균형 때문이었다. 2010년 러시아가 밀수출을 중단하자 이에 의존하던 중동 밀값이 요동을 쳤고 이로 인한 시위가 결국 정치 불신과 민주화 요구로 확산된 것이다. 밀 수급이 가져온 중동사태는 마치 프랙탈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보인다.
고대문명의 곳간은 지하공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시로 기후가 변하는 지상에 비해 지하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점을 이용해 지하암반에 대규모 곳간을 지으면 어떨까. 이미 우리나라는 지하공간을 이용한 석유비축경험도 많고 기반암도 견고하니 말이다. 식량 자급율이 22%에 불과한 우리나라 사정으로 볼 때 중동의 혼란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본고에서 고대문명의 곳간을 살펴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별다른 장치도 없이 공간 구조와 통풍만으로 기능을 유지했던 지하곳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적지 않아 보인다. 기술적인 측면도 그렇지만 시대적 배경과 구조를 유추하다 보면 거시적 역사에서는 볼 수 없던 소소한 민중의 삶, 문명의 뒤뜰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집트의 곳간
이집트 파윰(Fayum)에는 BC 1520년경 만들어진 곳간 일곱 개가 한데 몰려 있다. 지름 5.5~6.5m 깊이 7.5m로 간단히 계산해 봐도 1천톤의 곡물을 비축할 수 있는 규모다. 형태는 원형으로 파내려간 뒤 바닥과 벽을 흙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는 튼실한 지붕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매소포타미아의 곡창지대였던 므깃도(Megiddo)에도 이 무렵 지어진 곳간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움
움은 땅을 파내고 널을 얹은 소규모 지하곳간을 말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긴 겨울밤 움에서 꺼내 온 무나 고구마를 벗겨먹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보통 움은 겨울이 오기 전 집집마다 조그맣게 만든다. 그러나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연천 호로고루성의 움은 규모가 꽤 크고 튼실하다. 3m 깊이로 땅을 파고 바닥에 통나무를 깔았으며 벽에는 돌을 에둘러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문경 고모산성의 곳간은 신라시대 지하 목조건축을 대표한다. 내부구조를 3층으로 만들고 곡물 과실 씨앗류를 따로 저장하였는데 정교한 공간계획이 돋보인다. 가장 아래층에는 물을 담아둘 수 있게 만들었다. 규모는 360㎥ 정도이며 가로·세로·깊이는 각각 12.3×6.6×4.5m이다. 영남의 관문인 고모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 곳간은 아주 요긴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하랍파의 곳간은 바닥에 토대석을 깔고 내부공간을 12개로 구분하였다. 전체 면적은 836㎡으로 모헨조다로와 비슷하지만 각 방이 70㎡로 나누어져 있어 곡물관리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내벽은 벽돌로 쌓은 뒤 진흙으로 표면을 다듬고 윗쪽 벽돌은 엇갈려 배치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햇빛과 열을 차단하면서도 통풍이 잘되도록 하여 장기보관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리비아 원형곳간
이 곳간은 약 300년 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트리폴리 기후나 주거 흔적으로 볼 때 곳간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흙을 재료로 한 구조물의 성격상 주기적으로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흙벽돌로 쌓은 벽체에는 다시 진흙을 두텁게 발라 태양열이 내부까지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다. 척박한 기후와 외부침략을 견뎌낸 이들의 삶의 의지와 지혜가 돋보인다.
푸에블로 인디언 유적
절벽 중간에 옆으로 길게 뚫려있는 지하공간은 수만 년에 걸친 침식과 풍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랜드 캐니언은 퇴적층별로 강도가 다르다. 그래서 침식이 빨리 진행되는 약한 층은 상대적으로 깊이 파이는데 그 앞에 흙벽돌을 쌓고 입구를 만들면 이렇게 멋진 창고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규모가 큰 공간은 주거지로도 활용된다. 그랜드 캐니언 일대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주거지가 약 2000개소나 흩어져 있다.
저온숙성을 위한 포도주 창고
아르메니아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포도주 저장소는 아마도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주조시설일 것이다. 여기서는 6000년 전 술잔 단지 대접 포도씨 등이 발견되었다. 신전에서 행해지던 제의에 쓰일 포도주를 숙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샴페인으로 유명한 모엣샹동(Moet Chandon)은 로마시대 석회암 동굴에서, 몰도바 밀레스티(Milestii)는 55km의 지하동굴에서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구별의 미래, 종자저장고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