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히스키아, 예루살렘을 구한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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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히스키아, 예루살렘을 구한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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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0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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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공동의 성지다. 그래서 세력의 판도가 바뀔 때마다 영화와 박해가 반복되어왔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종교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 땅 밑에 그렇게 많은 통로나 저장 공간이 만들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전란 속에서 삶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의 아픈 흔적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금탑으로 장식된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곽과 유서 깊은 유적으로 유명하지만 땅 밑에서 발견되는 견고한 지하통로나 대규모 저장공간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중에서도 히스키아 수로터널은 매우 신성시되는 곳 중 하나다. 아시리아 침략에서 유대를 구하고 히브리교의 명맥을 현재까지 이어지게 한 중심에 바로 이 터널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은 소중한 자원이지만 성을 중심으로 한 고대 전쟁에서는 그 자체가 무기였다. 성곽은 방어를 위해 높은 곳이 선호되는데 그럴수록 물은 더 귀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략자들은 애써 성을 공격하는 대신 밖에서 진을 치고 물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 예루살렘과 성벽
BC.701년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도 이러한 전술을 폈다. 이스라엘, 라기스를 차례로 함락시킨 산헤립왕은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몰려왔다. 성 밖에 진을 친 그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아도 성안에 물이 떨어지면 스스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성 밖으로 물을 뿌리며 여유를 보이자 산헤립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히스키아 수로터널과 지하 저수조
어떻게 그리 많은 물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사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주요한 길목이었지만 표고가 750m나 되어 늘 물이 귀했다. 연간 500mm 정도 오는 비는 전시는 물론 평시 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량이었다. 지금도 거리에서는 항아리에 물을 담아두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한 컵씩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부터 이어지는 풍경이다.

예루살렘에는 집집마다 저수조가 있어 비가 오면 지붕이나 주변 빗물이 흘러든다. 그러나 집안에 물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사빌(sabil)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저수조에서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 급수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던 이 사빌의 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돌아서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물은 성 밖의 샘에서 터널을 통해 성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실로암을 비롯 많은 저수조를 가득 채워준 이 물길이 적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은 구했던 것이다. 최근 예루살렘 모리아산(Mt moria)에서는 암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거대한 지하저수조가 발견되었는데 내부공간의 크기가 무려 250톤의 물을 담아둘 수 있는 정도다.

▲ 히스키아 터널 입구(좌), 터널내부(중), 지하저수조(우)
이 저수조는 예루살렘 초기인 BC.1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암반특성이나 불규칙한 내부형태로 보아 바위를 모두 인력으로 파낸 것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암 공동을 다듬고 확장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저수조의 벽과 바닥에는 물이 새지 않도록 시멘트를 칠했는데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꾼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미스테리한 터널형태
예루살렘 동쪽의 키드론 계곡은 다윗이 아들의 반란을 피해 도피했던 곳이다. 포크너의 소설 ‘압살롬 압살롬’으로 유명해진 이 계곡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하나 있다. 왠간히 비가 오지 않아도 계곡 뒤의 올리브산과 스코푸스산에서 스며드는 물이 많아 샘이 마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루살렘의 중요한 수원지인 이 샘은 성 마리아 샘 또는 기혼샘이라 불린다.

예루살렘 초기에는 산을 옆으로 돌며 만든 도랑을 통해 성안까지 물을 끌어왔다. 그러나 성이 포위된다면 쉽게 눈에 띠는 이 도랑을 적군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BC.722년 이스라엘이 정복되고 뒤이어 라기스마저 함락되자 히스키아왕은 기혼샘에서 실로암까지 직접 터널을 뚫으라고 명한다. 마침내 지하수로가 완공되어 물이 흘러들자 땅위에 있던 도랑을 모두 파괴하고 그 흔적까지 지워버렸다.

이 터널은 사모스섬의 에우팔리노스 터널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공사시기도 거의 비슷하며 둘 다 침략에 대비해 숲속의 샘을 성안으로 끌어온 터널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터널 규모나 정밀성 측면에서는 차이가 크다. 에우팔리노스 터널은 1,036m 전 구간이 거의 직선이고 단면도 3.7㎡로 일정하다. 작업과정이 정밀한 계획과 측량에 의해 추진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히스키아 터널은 전혀 딴판이다. 별다른 측량없이 높낮이만 간단히 맞추며 뚫어 나간 것이다. 터널길이만 해도 그렇다. 기혼샘과 실로암까지 직선거리는 269m에 불과하지만 실제 터널은 S자 형태로 전체 길이가 533m나 된다. 단면의 크기도 0.7㎡에서 1.5㎡까지 제각각이다. 입출구 높이차는 2.18m 정도인데 기울기에 별 문제없이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떻게 이런 터널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 히스키아 터널의 종단면도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의문에 답을 제시해왔다. 터널을 S자로 뚫은 것은 직상부에 있는 선왕의 릉을 피하기 위해서다, 터널단면은 공사 후 유지관리가 불필요하므로 최소 공간 위주로 뚫어서 그렇다는 등. 이외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이나 실로암 비문에 나오는 문구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속시원하게 납득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공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 실로암 비문
하지만 지반특성이나 실로암 비문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의문은 그렇게 미스테리할 것도 없다. 히스키아 수로터널을 신성시하는 유대인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 터널은 순수하게 사람이 뚫은 게 아니라 자연동굴을 확장한 것으로 보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석회암지대에서 오랜 세월 물이 흐르면서 공동과 물길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말이다.

실로암 비문에는 터널관통 전에 바위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니까 터널을 파기 전에 이미 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성서에도 수로가 만들어지기 전에 바위틈에서 나온 물이 실로암못으로 흘러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사무엘상.8:6). 1978년 이 터널을 조사한 지질학자 길(D. Gill)은 터널주변 다른 바위틈에서도 물이 흐른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최소 4만년 이상 된 것이었다.

히스키아 수로터널을 기존의 석회암 틈을 확장한 것으로 보면 여러 의문이 잘 맞아 떨어진다. 터널 방향이 S자로 굽어진 점, 특별하게 측량을 하지 않고 뚫을 수 있었던 점, 터널 단면이 이렇게 들쑥날쑥한 점이 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적인 석회암 수로의 경우 방향이나 공동의 편차가 커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곳을 만나면 아예 새로운 쪽으로 터널을 뚫거나 높낮이를 다시 조정해야했을 했을 것이다.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이렇게 보면 히스키아 수로터널은 자연과 인간이 합작해서 만들어 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연적인 수로를 확장한 것이긴 해도 그 작업은 견디기 힘든 수고와 인내를 요구했을 것이다. 어쨌든 환기와 조명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만들어 낸 히스키아 수로터널은 지하공간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유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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