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골]백해무익 종심제
상태바
[사당골]백해무익 종심제
  • 정장희 기자
  • 승인 2023.04.20 11:13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엔지니어링업계의 종합심사낙찰제 탄원에 정부가 ‘실효성 없는 대안’으로 화답했다. 언 발에 오줌을 누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고 기술력 위주의 평가를 하겠다고 도입한 종심제는 국내 실정과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백해무익한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가격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0.1점이라도 기술점수를 더 받으면 그대로 낙찰이 되는 총점차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수많은 불합리를 양산했다. 

총점차등은 더 많은 전직 관료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많은 영업활동을 하게 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당연히 엔지니어링사의 영업이익은 추락하고 실제 일을 하는 엔지니어에게 돌아갈 몫도 줄어들었다. 기술력이 아닌 전관의 영업력으로 수주 여부가 좌우되다 보니 경영진, 엔지니어 모두 사기가 뚝 떨어졌다. 

과다한 영업으로 인해 사법리스크에 더 노출된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15억~25억원 규모로 대단하지 않은 사업까지 모두 종심제로 수행하다 보니 건당 제안 비용도 부담이다. 하지만 이런 제안 비용도 전관과 영업비용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전 세계의 모든 분쟁의 기원을 올라가면 영국이 있듯 엔지니어링업계의 부조리와 경쟁력 약화의 원천은 종심제에 있는 것이다.

업계가 요구한 개선안은 기본설계 30억원+난이도, 실시설계 50억원+난이도, 감리 70억원+난이도였다. 하지만 정부는 30억원, 40억원, 50억원으로 기준금액을 소폭 늘리는 수준의 결정을 내렸다. 이 와중에 난이도 항목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정부는 입장에서는 절충안이라고 내놓은 것이겠지만, 업계 입장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기준금액이 늘면 5개공구로 발주되는 것을 3개공구로 바꿔 발주하면 그만이다. 역설적으로 단위사업별 합종연횡은 더욱 강화되고, 발주처와 전관의 힘은 더 세질 것이다. 정부가 종심제를 장려하고 과다한 영업을 근절시키고 싶다면 낙찰률 하락 없이 총점차등은 빼고 난이도 항목을 적용해야 한다.

종합심사낙찰제 자체는 죄가 없다. 어떠한 낙찰자 결정 방식이라도 각자의 장점은 있다. 다만 제도를 적용하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좋다고 다 가져다 쓰면 부조리를 양산하는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발주처와 공무원이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고 영생까지 누릴 수 있게 하는 종심제를 싫어할 리가 없다. 오죽 좋았으면 지방계약법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까지 종심제를 도입한다고 했을까 싶다. 연간 286건에 9,100억원 달한다니 앞으로 지자체에 종심제가 도입된다면 지역공무원의 힘도 더 강해질 것이다.

종심제를 둘러싸고 정부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업계도 정부와 같은 선상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누가 전관을 데려가라고 했나. 누가 영업을 하라고 했나.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업계에서 선제적으로 발주처의 권력을 키워온 것은 사실 아닌가. 몇 년 전 엔지니어링 CEO모임에서 “종심제가 영업으로 인해 혼탁하니, 서로 하지 말자”라는 신사협정을 맺은 바 있다. 그럼에도 지금 와서 정부에 “종심제가 문제가 많으니 축소시켜달라”라고 탄원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한 꼴이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수년 전부터 토목을 탈출하자는 뜻의 ‘탈토’가 입에서 입으로 번져 이제는 공식용어가 됐다. 종심제를 비롯한 수많은 부조리를 경험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정부와 업계의 욕심에 결국 엔지니어링업계는 젊은 인재들이 꺼려하는 기피업종이 된 것이다. 이런 식이면 엔지니어링에는 전관과 경영진만 남게 될 것이라는 자조적인 농담도 횡횡한다. 

결국 엔지니어링 목적구조물은 실무엔지니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들 부실로 여기저기서 붕괴하고 사고 나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나. 이들이 탈토하지 않고 엔지니어링업계에 애정을 갖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경영진과 정부가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머리를 다시 맞대야 할 것이다.

정장희 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7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goodk 2023-04-21 15:25:47
닥치고 일만 하는 사람들은 노비요, 일도 하고 생각도 하는 사람들은 자유인 일텐데, 지금도 열심히 일만 하자는 브로커 머슴 대장들이 여기저기 널렸다

98번 종점 2023-04-21 08:50:45
이 모든게 내 탓이다하고 살자.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하셨다.

사람세상 2023-04-21 08:22:59
업계 자업자득이다
이런식이라면 어떤 제도를 갔다 놔도 마찬가지
종심제로 영업 비용이 생각 보다 늘어나니 영업비용 아껴보자는 업계 의견을 대변하는 기사라 어찌보면 엔지니어링데일리 속성상 당연한 기사이다

전관자들 누가 데려다 쓰는가?
주요한 정관 자가 퇴직하면 서로 영입하겠다고 덤벼들어 몸값까지 키우고 자기 식구 기술자 대우에는 소홀한걸 보면 업계 스스로 이런 주장이 나오선 뻔뻐놘 것 아닌가?

제도 탓하지 말자 현실 탓하지 말자
누가 제도 현실을 만들고 누가 이런식으로 이용하는지
스스로 고백 글도 아니고
부끄러움은 알았으면 좋겠다

5883 2023-04-20 23:09:01
엔지니어들은 모래알

낡은엔지니어 2023-04-20 18:25:40
힘없고 스스로 타락한 엡계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노예 생활을 만족하고 있는 선배 엔지니어로서 수치스러움도 느낍니다.
이제까지 잘먹고 잘 산 시니어 엔지니어들과 지적한대로 발주자들의 화려한 뒤안길이 보장된 제도에 대한 높은 만족도가 결국 우리 후배 엔지니어들의 삶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답답하고 미치도록 창피한 하루를 꼬박 지내고 이제야 자판이라도 두드릴 힘이 생깁니다.
언론에서라도 이렇게 날것의 문자로 비판을 해 주시니 솜털같은 숨이라도 쉽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