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철학이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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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철학이 없는 나라
  • 조항일 기자
  • 승인 2023.11.10 14: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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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일 기자
조항일 기자

엄숙주의가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몇몇 사안들은 성역화와 동시에 언급이 금기시 돼 있다. 대부분 여성, 약자, 소수자, 저소득자와 같은 흔히 사회적 피해자라고 일컬어지는 자들과 연관한 일들이 대상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온건한 자세와 포용만 허용될 뿐 비판적인 시각이나 언론은 무지성한 객체로 여겨진다.

건설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안전사고도 마찬가지다. 처벌이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 어떻게든 범인을 만들어 내야만 사태가 진정된다. 그럴만도 한게 전통적으로 건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인데다 건설사 대부분의 주력상품인 아파트는 터무니 없는 고분양가를 내놓으니 일거수일투족이 밉상이다. 올해는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불량 아파트가 발견됐으니 오죽하겠나. 건설현장 사고 대부분이 인과관계가 제대로 확인되기도 전에 언제나 ‘서민들의 목숨은 벌레 취급하는 돈에 환장한 재벌가의 횡포’로 고착화 되는게 무리도 아니다.

문제는 철학은 없고 감성만 풍부해진 사회적 분위기가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에도 가차없이 적용된다는 데 있다. 대부분 시설물을 만드는 건설엔지니어링업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모든게 인간이 하는 일이라 연원을 따지자면 결국 인재가 아닌게 없겠지만 현재의 기술로도 거대한 자연을 상대로 저항하는데 무력해지는 시점은 언제나 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안전은 정의로운 것이요, 사고는 불의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지배당해 건설적인 한걸음을 전혀 떼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성숙함이 없다면, 안전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계속될 사고에 대해서 정부와 사회가 취할 방법은 오로지 법적 처벌 강화다. 이미 중대재해법과 산업안전보건법, 건설안전특별법이 있음에도 사고가 계속되고 있는데 정부는 단 한번도 처벌 이외의 방법을 내놓은 적이 없다. 인간의 창의를 발휘하길 포기한 것이라면 공무원을 굳이 둘 필요가 없다. 방향성이 이렇게나 확고한데 인간보다 일처리가 신속하고 정교한 AI를 도입하면 될 일이다. 사람이 없어지면 전관 문제나 로비도 덤으로 해결될 것이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해외에서는 벌점 제도가 없다. 벌점은 그저 해외 경쟁사에게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발주청에게는 입찰 전부터 낙인이 찍혀서 감점이 된다. 해외 선진국들은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입찰에서 제외할 뿐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붕괴사고가 나면 해당 설계사와 시공사에게 재설계, 시공을 맡기는 경우도 있다. 사고는 났지만 “이 시설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너희들이 문제를 분석하고 다시 잘 만들어”라는 의미다. 물론 기회는 단 한번이다. 우리에게 과연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까. 경제력이라는 몸집은 커졌지만 이제는 격에 맞는 사고도 쌓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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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기자 2023-11-13 11:27:41
조항일 기자님은 철학이 있습니다.
(레거시 신문사들의 기자들보다 훨 철학이 있고, 문맥에 맞는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특히 전관문제에 관해서는 초지일관, 주야장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건승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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