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정부의 엔지니어링게임
상태바
[기자수첩]정부의 엔지니어링게임
  • 조항일 기자
  • 승인 2024.01.09 23:5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항일 기자
조항일 기자

2020년 국토부는 건진법 개정안을 통해 벌점부과 방식을 합산벌점으로 바꿨다. 벌점의 영향력이 미미해 변별력을 두겠다는게 개정안의 취지였다. 합산벌점 이전의 누계평균방식은 총 벌점을 현장 수로 나눠 평균을 적용했다. 반면 합산벌점은 총 벌점을 현장수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평균값을 적용하도록 했다. 현장을 다수 보유한 대형사들은 역차별을 주장하면서 사안을 규제개혁위원회로 끌고갔다. 그리고 현재 합산벌점은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벌점 부과방식은 이전의 누계평균방식이 좀 더 타당해 보인다. 소수점으로 수주사가 바뀌는 예민한 산업에서 지난 정부의 대형사 적폐 프레임으로 탄생한 합산벌점은 태생적 한계가 명확했다. 우수관리비율에 따른 인센티브와 무사망사고 기간에 따른 벌점 경감 제도가 추후 개정안에 담긴게 근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합산벌점 이후에도 업계는 개정안 이전 수준의 벌점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안전조직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면서 현장관리에 총력을 다해서라는게 공식적인 이유지만 벌점 맞을걸 경고로 막을 수 있도록 공무원 관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변별력을 두겠다는 취지는 실패했지만 공무원들에게는 명분과 로비를 모두 잡은 작품으로 자화자찬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4년후 행안부가 지방계약법 개정안을 통해 당시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특히 현재 업계가 법적대응을 불사하겠다는 핵심인 지자체 PQ자율권 부여와 부실벌점 감점 확대는 행안부의 족적을 아로새기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다. PQ자율권은 이미 제도적으로 발주처가 사업특성에 맞게 ±20% 내외에서 평가항목을 조정할 수 있다. 벌점의 경우에는 건진법상에 명시돼 있는 벌점 경감제도를 사실상 무위로 돌리는 격이라 월권행위라는 지적이 상당하다. 시시비비를 떠나 실제 벌점을 줄 수 있는 것은 국토부인데 행안부는 이것을 재해석해 스스로의 권력을 격상시켰다는 건 대단한 발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진법의 주체인 국토부는 조용하다. 과거의 내가 한 일이 떠올라서인지, 행안부의 입지가 만만치 않아서인지, 엔지니어링이 국토부의 서자라서인지, 행안부가 국토부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지 않으면 업계를 양분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인지 별의 별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정부는 엔지니어링업계의 로비라는 보상이 걸린 게임을 지속한 지 오래고 또 능숙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되버린 것은 남탓 할 것 없이 명백한 업계의 책임이다. 세상 이치라는게 오래되면 피로감이 누적되고 싫증이 나면서 시스템이 바뀌기 마련인데 엔지니어링업계는 쥐어짜면 짤수록 더 큰 선물을 안긴다. 오죽하면 투명성을 이유로 종심제 평가위원을 늘리겠다는 데 로비 대상을 좁히기 위해 외부위원이 아닌 내부위원 비율을 높여달라고 요청하는게 엔지니어링업계다.

한국의 엔지니어링사 규모에서는 4,000억원 실적이 마지노선이라던 엔지니어링 수주실적은 또 한번 경신됐다. 업계의 전문가들도 이정도면 기술력 이상의 무언가가 반드시 작용했다고 해석하는 이유다. 그러한 점에서 최근 들리는 업계의 자정결의안은 누군가에게는 코미디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내로남불로 비칠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민태산 2024-01-10 10:45:22
기사가 너무 맵군요. 양쪽 모두 뼈를 때리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기사네요. 보통 기사를 읽을 때 양비론을 상당히 싫어하는 편인데, 이 기사만큼은 양비론이 존재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제3자가 볼 때는 이 치킨게임이 상당히 재미있고 코메디일 수 있지만, 항상 갑과 을 사이에 승자는 정해져있죠. 그래서 심지어 게임에 비유하는 것 조차 민망할 정도입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