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골>한단계 더 P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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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골>한단계 더 P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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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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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영국수상 맥밀런이 식민지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하자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식민지의 독립이 본격화된다. 영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강경론을 맞서지만 2차대전 이후 상실된 대영제국의 힘으로 이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1947년 델리에서 인도 마지막 총리인 마운트배튼경의 의회연설을 끝으로 유니언잭이 내려지고 인도 국기가 게양됐다. 요르단, 파키스탄, 이스라엘, 브루나이, 바하마, 피지 등에서 1997년 홍콩반환까지 전세계의 영국식민지가 독립되고 반환됐다. 영국이 식민지를 포기한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정책과 함께 이를 유지할 경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노래하던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은 이제, 위대했던 시대를 자위하는 영국인들의 흘러간 옛 노래일 뿐이다.

한국 SOC는 60~90년대 산업화시기를 관통하면서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산업화 초기 SOC산업의 핵심은 정부였고, 엔지니어링사와 건설사는 국가가 주도하는 정책에 발맞추며 성장해 왔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약간의 부작용은 있었지만 단기간내 대단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지 않던가. 국가주도의 산업화도 벌써 반백년이 지났으니 말이다. 이쯤되면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포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위주의 SOC산업도 민간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어쩌면 한참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득권측에서 봤을 때 식민지독립이든 민간이양이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3%인 백인이 97%인 흑인을 지배한 영국령 로디지아가 1979년 흑인정권인 짐바브웨로 바뀌기까지 15년간 내전을 겪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백인용병은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단한번의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았지만, 결국 짐바브웨는 독립한다. 도도하게 밀려오는 반식민지독립의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현한국의 SOC상황은 1960년대 식민지독립 시기와 같다. 주도권은 여전히 정부-발주처가 쥐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국가가 주도할만큼 민간의 수준이 낮지도 않고, 더 근본적으로 99,720㎢ 밖에 되지 않는 한반도의 절반은 이미 개발할 만큼 개발됐기 때문이다.

전세계 SOC발주 체계는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되고, 엔지니어링그룹이 주도하는 PMC로 아주 오래전 재편됐다. 이 때문인지 한국도 수년전부터 PMC에 대한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정부-발주처는 예전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여전히 손톱만한 기득권만을 쥐고 있다. 독립을 주창하는 식민지인들에게 가했던 끝자락 제국주의처럼 PMC를 주장하는 자에게 암묵적인 탄압을 가하고, 발주권한을 내세워 민간이 만들어낸 해외PMC프로젝트에서 숟가락을 얹고 있을 뿐이다.

2012년 엔지니어링포럼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된 PMC 담론은, 지난 7월 포럼에서 보다 확장된 형태로 논의됐다. 엔지니어링업계 리더가 200명가까이 참여했고, 종료시점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만큼 후진적인 한국의 엔지니어링과 발주체계를 개혁해 해외에 진출하자는 열망이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엔지니어링포럼은 부당함과 필요성을 역설했던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한단계 진일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PMC시장구조 분석, 건설엔지니어링의 PMC 비즈니스 모델, 플랜트 PMC 비즈니스 모델 등 3개로 구성된 워킹그룹이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 한국 엔지니어링의 PMC진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단한번의 연구로 발주체계와 엔지니어링의 혁신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탈식민지화 시기의 세계처럼 글로벌화, 선진화로 나가고자 하는 한국엔지니어링의 첫 주춧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엔지니어링데일리 정장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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