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큐멘터리 촬영차 필리핀 일대 SOC 현장을 다녀왔다. 우리 엔지니어와 현지 발주처, 주민을 포함해 100여명을 만나 취재하며 다다른 결론은 한국 엔지니어링의 돌파구는 결국 해외에서 찾을 수밖에 없고 해외건설의 주도권은 시공이 아닌 엔지니어링이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해외건설은 1965년 파타닛 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만건, 1조달러를 벌어들이며 한국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수주금액은 10여년 전의 반토막에 불과하고 그 중 토목시공은 17억달러로, 설계감리 38억달러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한때 한국건설을 이끌던 토목시공은 중국을 위시한 개발도상국의 가격경쟁력에 밀려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난이도가 있는 플랜트가 242억달러로 해외건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토목시공 하락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현상이다. 개도국 건설사는 40원이면 된다는데 한국 같은 선진국은 80원을 받아도 실행이 훌쩍 넘어가니 당할 장사가 있겠나. 당장 EDCF가 공여해 한국건설사가 시공하고 있는 필리핀의 한 현장만 해도 실행이 150%에 육박한다. 아무리 월 50만원 수준의 현지 노동자를 고용한다고 해도 한국건설사 직원의 인건비가 높아 경쟁력이 없는 것이다. 통상 대부분의 동남아 현장에서 중국이나 현지건설사가 시공을 하고 한국, 일본이 엔지니어링컨설팅을 담당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한국의 능력이 높아지면서 도화 카이사캇 정수장, 수성 LRT2 모두 PMC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결국 선진국은 기술력과 실적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영역인 엔지니어링을, 개도국은 낮은 인건비를 이용한 시공시장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 미국, 유럽, 호주, 싱가폴, 일본까지 더 이상 시공을 주력으로 하지 않고 건설산업을 엔지니어링으로 전환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결이 다른데 이미 해외토목시공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없다시피한데도 여전히 주력으로 대접한다. 정부는 엔지니어링컨설팅보다는 토목시공에 주안점을 두고 정책방향을 설정해 계속된 홍보를 하고 있다. 좋게 생각하면 산업화 시대에 빛을 발했던 해외건설신화를 아직까지 신봉하는게 아닐까 싶다.
선진국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의 해외건설 정책은 정확히 엔지니어링 주도로 가야 한다. 선진영역인 PMC, 민자사업 능력을 키워 인당 단가를 극대화하는 고부가가치를 우선한 뒤에 한국시공사에게 일감도 던져 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의 해외건설 전환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전혀 글로벌하지 않은 국내 엔지니어링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고 공기업이 보유한 PMC 독점권한을 민간에 풀어야 한다. 한국형 ODA 측면에서는 조단위 토목시공을 한 개의 사업에 몰아주는 허세형보다는 그 돈으로 100개의 컨설팅으로 공여해 사업을 발굴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이어야만 엔지니어링사와 건설사의 능력과 일감이 모두 크게 늘어날 수 있다.
가장 핵심은 선진형 컨설턴트사업 확대와 엔지니어링사의 실질적, 사회적 대우를 늘려야 한다. 선진엔지니어링사나 한국건설사보다 낮은 임금과 처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공대생이 엔지니어링사 해외근무를 한다고 하겠나. 엔지니어링사는 로비를 줄이고 EDCF는 컨설팅 발주와 대가를 크게 늘린다면 능력있는 공대생들이 엔지니어링에 몸담을 수 있지 않겠나. 다큐 촬영 중에 필리핀 한식당 한켠에서 홀로 국밥에 반주로 소주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는 시니어엔지니어를 보면 나라도 이 고생하면서 해외사업에 지원하지 않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