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페트라, 바위산을 조각해 만든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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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페트라, 바위산을 조각해 만든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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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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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은 돌을 깍아서 아름다운 신상을 만들었다. 로마인은 원형극장을, 이집트인은 스핑크스와 장제신전을, 중국인은 끝없이 이어지는 성곽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바테아인은 그 모든 것이 담긴 도시를 만들었다.

▲ 페트라의 입구(Siq)
1812년 중동을 여행하던 부르크하르트(J.L.Burckhardt)는 잊혀진 사막도시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곧 팀을 꾸려 사막으로 떠났다. 수년간 헤매고 다닌 끝에 부르크하르트는 마침내 거대한 협곡 뒤에 서 있는 도시와 만나게 된다. 페트라(Petra), 도시 전체를 알 굽타(Al Kubtha)산이 감싸고 있는 이 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시가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척박한 환경, 그러나 1600년 전에는 수만 명의 주민과 세계 각지에서 온 상인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신전에서는 때마다 제의가 치러졌고 원형극장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려는 인파로 붐볐다. 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가 오랜 세월 사막 속에 버려져 있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페트라의 역사  

▲ D.Robert가 그린 페트라(1839)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BC,7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도시규모로 성장한 것은 BC.1400년경이다. 당시 지명은 셀라(Sela)로 유대 종족인 에돔(Edom)의 수도였다. 이집트를 벗어난 모세는 이곳을 통과하려고 했지만 에돔의 거절로 38년간 사막을 헤매야 했다. 지금도 주변에는 모세의 샘, 모세 계곡(Wadi musa) 등 모세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남아있는 유적 대부분은 BC.7세기 나바테아인이 만든 것이다.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테아인은 이곳을 천연요새로 만들고 통행세와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BC.312년에는 알렉산더의 침입을 막아내었는데 이후 인구 3만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105년 로마에 정복된 이후에도 페트라는 교역도시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러나 동·서 로마가 분리되고 세력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면서 페트라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대상의 발길이 뜸해지고 551년 지진으로 수로가 파괴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도시를 떠나갔다. 물이 없는 사막도시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십자군이 잠시 요새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페트라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붉은 사암의 물결

▲ 사암의 화려한 무늬
페트라의 건축물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독특한 사암(sand stone) 때문이다. 사암은 5억년전 생명의 대폭발로 불리는 캄브리아기의 퇴적암이다. 층층이 다른 색을 보여주는 바위는 우아한 곡선과 원색의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하다. 마치 거장의 손길인 듯한 섬세한 무늬와 인간의 조형이 더해져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무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석영·장석이 주성분인 사암은 보통 단조로운 색을 띤다. 그러나 페트라의 사암을 구성하는 물질은 매우 다양하다. 이 일대는 원래 평탄한 해저 지형이었으며 페트라는 해안단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퇴적물이 쌓인 뒤 지반 융기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암은 풍화에 약하지만 페트라 유적은 대부분 당시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이 역시 알 굽타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건축 과정
도시계획 측면에서 페트라는 좀 느슨하다. 시설물이 일정한 패턴 없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으며 중심도로도 없다. 이를테면 계획도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역 전체가 암반이어서 형편에 맞게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건축물 하나하나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아쉽게도 도구나 작업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건축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말이다.

▲ 오벨리스크 톰브
짓다만 건축물로 어렴풋이 추정해 보면 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설계자는 먼저 전체 지형을 바라보면서 건축위치를 잡는다. 암반의 크기나 형태가 적당한 지 꼼꼼히 살핀 다음 상세설계에 들어간다. 용도에 맞게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 따져보고 내부공간과 조형물 설계가 끝나면 외부벽면을 위에서부터 조각해 내려간다.
엄청난 암반을 제거해야하는 전면벽 조각은 가장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모암이 손상되면 회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도로 훈련된 숙련공이 맡았을 것이다. 실수에는 목숨을 담보로 한 책임이 따랐을 것은 당연하다. 내부 작업은 벽체조성이 끝난 뒤 시작했다. 외부가 미적인 섬세함을 갖추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내부는 하중을 지탱하고 구조적인 안전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와디 무드흘림 수로터널(wadi mudhlim)
▲ 댐과 터널(좌), 바위벽면의 수로(우)
와디 무드흘림은 마른 강이란 뜻이지만 우기에는 홍수가 나기도 한다. 나바테아인은 이 물을 끌어오기 위해 댐과 터널 그리고 수로를 만들었다. 주변지형을 고려해 만든 이 댐에 물이 채워지면 88m의 터널을 지나 도시로 흘러들었다. 수로는 경사유지를 위해 바위 벽면을 일정하게 파서 만들었다. 물이 잘 세는 사암 특성을 고려해 수로 안쪽은 석회로 방수처리를 했다.
도시에도 곳곳마다 수로가 갖추어져 물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순수하게 자연경사만으로 물을 이동시켰던 당시에 물이 흐르도록 계획하는 것은 건축물 설계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막도시 페트라가 인구 3만명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수로터널로 물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 카즈네(Al Khazneh) 궁

▲ 알 카즈네
페트라의 도시유적은 긴 바위틈으로 난 협곡(Siq)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높이가 200m에 이르지만 폭은 사람 몇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간간히 터진 틈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면 동굴로 착각될 정도다 그렇게 1.2km 정도 들어간 끝에 앞이 환히 트이면서 웅장한 시설물이 가로막는다. 바로 알 카즈네다.
알 카즈네는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페트라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내부 규모나 형태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궁은 나바테아의 전성기였던 BC.1세기에 건립되었다. 높이 43m 폭 30m로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전면을 받치고 있다. 중앙에는 제우스의 아들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기마상과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기둥 안쪽에는 정방형의 큰 방과 여러 개의 작은 방이 있다. 

알 데이르(Al Deir) 사원

▲ 알 데이르
알 데이르는 규모가 가장 크며 800 계단을 올라간 뒤 만날 수 있다. 알 카즈네가 협곡에 숨어 여성스러운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알 데이르는 산정에 우뚝 서서 남성다운 웅장함과 선이 굵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폭 50m 높이 40m인 사원 앞에 서면 절벽 위에서 다시 절벽을 만나는 느낌이다.
이 건축물이 사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4세기경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방 내부에는 기독교 문양이 그려져 있지만 그 자체로도 퇴적지층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실제로는 이 건물이 무슨 용도인지 이렇게 높은 산정에 건물을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주거지와 동떨어져 있고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전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원형극장(Amphitheatre)
▲ 원형극장
원형극장은 페트라의 문화와 설계능력 그리고 미적 감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설이다. 무대와 객석 부대시설 양식으로 보아 로마에 정복된 105년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로만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이 거대한 극장이 하나의 암반을 통째로 조각해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무대 양측에는 섬세하게 다듬은 6m의 화강암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은 이집트나 터키에서 옮겨왔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공연이 열렸겠지만 단순히 오락을 위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성스럽게 조성한 시설물을 보면 왕의 즉위나 장례와 같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전체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을 것이다.  
 
페트라의 몰락
▲ 대사원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
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로마에 정복된 105년 이후에도 무역도시로서의 화려한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동서양을 잇는 페트라가 로마 이익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페트라를 재정비한 뒤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잇는 교역로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4세기 무렵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 세력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감에 따라 페트라는 점차 무역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363년 지진까지 겹치면서 페트라의 인구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페트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551년의 대지진이다. 이로 인해 수로와 건축물이 파괴되고 물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11세기경 잠시 십자군의 요새로 이용되긴 했지만 1812년 재발견될 때까지 과거의 영화를 묻어둔 채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페트라는 발견된 뒤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 90% 이상이 모래 밑에 잠들어 있다. 전체가 드러났을 때 어떤 모습일지 자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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