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링업계의 종합심사낙찰제 탄원에 정부가 ‘실효성 없는 대안’으로 화답했다. 언 발에 오줌을 누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고 기술력 위주의 평가를 하겠다고 도입한 종심제는 국내 실정과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백해무익한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가격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0.1점이라도 기술점수를 더 받으면 그대로 낙찰이 되는 총점차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수많은 불합리를 양산했다.
총점차등은 더 많은 전직 관료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많은 영업활동을 하게 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당연히 엔지니어링사의 영업이익은 추락하고 실제 일을 하는 엔지니어에게 돌아갈 몫도 줄어들었다. 기술력이 아닌 전관의 영업력으로 수주 여부가 좌우되다 보니 경영진, 엔지니어 모두 사기가 뚝 떨어졌다.
과다한 영업으로 인해 사법리스크에 더 노출된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15억~25억원 규모로 대단하지 않은 사업까지 모두 종심제로 수행하다 보니 건당 제안 비용도 부담이다. 하지만 이런 제안 비용도 전관과 영업비용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전 세계의 모든 분쟁의 기원을 올라가면 영국이 있듯 엔지니어링업계의 부조리와 경쟁력 약화의 원천은 종심제에 있는 것이다.
업계가 요구한 개선안은 기본설계 30억원+난이도, 실시설계 50억원+난이도, 감리 70억원+난이도였다. 하지만 정부는 30억원, 40억원, 50억원으로 기준금액을 소폭 늘리는 수준의 결정을 내렸다. 이 와중에 난이도 항목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정부는 입장에서는 절충안이라고 내놓은 것이겠지만, 업계 입장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기준금액이 늘면 5개공구로 발주되는 것을 3개공구로 바꿔 발주하면 그만이다. 역설적으로 단위사업별 합종연횡은 더욱 강화되고, 발주처와 전관의 힘은 더 세질 것이다. 정부가 종심제를 장려하고 과다한 영업을 근절시키고 싶다면 낙찰률 하락 없이 총점차등은 빼고 난이도 항목을 적용해야 한다.
종합심사낙찰제 자체는 죄가 없다. 어떠한 낙찰자 결정 방식이라도 각자의 장점은 있다. 다만 제도를 적용하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좋다고 다 가져다 쓰면 부조리를 양산하는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발주처와 공무원이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고 영생까지 누릴 수 있게 하는 종심제를 싫어할 리가 없다. 오죽 좋았으면 지방계약법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까지 종심제를 도입한다고 했을까 싶다. 연간 286건에 9,100억원 달한다니 앞으로 지자체에 종심제가 도입된다면 지역공무원의 힘도 더 강해질 것이다.
종심제를 둘러싸고 정부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업계도 정부와 같은 선상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누가 전관을 데려가라고 했나. 누가 영업을 하라고 했나.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업계에서 선제적으로 발주처의 권력을 키워온 것은 사실 아닌가. 몇 년 전 엔지니어링 CEO모임에서 “종심제가 영업으로 인해 혼탁하니, 서로 하지 말자”라는 신사협정을 맺은 바 있다. 그럼에도 지금 와서 정부에 “종심제가 문제가 많으니 축소시켜달라”라고 탄원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한 꼴이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수년 전부터 토목을 탈출하자는 뜻의 ‘탈토’가 입에서 입으로 번져 이제는 공식용어가 됐다. 종심제를 비롯한 수많은 부조리를 경험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정부와 업계의 욕심에 결국 엔지니어링업계는 젊은 인재들이 꺼려하는 기피업종이 된 것이다. 이런 식이면 엔지니어링에는 전관과 경영진만 남게 될 것이라는 자조적인 농담도 횡횡한다.
결국 엔지니어링 목적구조물은 실무엔지니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들 부실로 여기저기서 붕괴하고 사고 나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나. 이들이 탈토하지 않고 엔지니어링업계에 애정을 갖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경영진과 정부가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머리를 다시 맞대야 할 것이다.
정장희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