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트럼프 당선 이후 국제정세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미국의 무자비한 관세정책 이후에는 각국의 근간산업이 뿌리 채 흔들리면서 세계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있다. 그사이 한국에서는 계엄과 탄핵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시대가 들어서려는 가운데 차기 행정부의 평가는 단연 경제회복에 달려있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근간인 반도체와 시대의 아이콘이 된 방산, 조선, 자동차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 여기에 본지는 전세계 10여개국만이 수행가능한 건설엔지니어링 시장이 우리가 주목한 차기 국가 기반산업으로 보고 본 기획을 연재한다. |

(엔지니어링데일리)조항일 기자=대한민국의 반도체, 자동차, 조선, 방위산업 등 4대 산업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반도체는 2022년 기준 전세계 시장의 17.7%를 차지하면서 글로벌 1~2위를 다퉜고 특히 메모리 분야는 60% 이상을 차지했다. 가성비 차의 대명사로 불리던 현대자동차는 2024년 글로벌 판매 3위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핵심 산업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일본이 주름잡던 조선 시장을 가격 우위를 앞세워 맹추격한 한국은 낮은 가격의 철강비와 인건비를 필두로 무장한 중국 조선업을 LNG선과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시장을 공략해 전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트럼프 전후로 신냉전시대과 된 세계정세로 한국의 방위산업도 세계의 아이콘이 됐다.
4대 산업이 세계시장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것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정부 차원의 제도 지원과 인프라, 대형사를 중심으로 한 R&D 투자와 인재양성 등이 맞물려 있다.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산업이라는 특성으로 상대적으로 완화된 규제 역시 한몫했다.
▲안전 나르시즘에 빠진 한국
물론 이들 업계에도 안전을 붙이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자동차업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자율주행 상용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에서는 이미 상용화와 관련된 기술은 물론, 법제도가 완화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이지만 한국은 법적, 윤리적 문제로 실증단계에 머물러 있다. 특히 데이터 수집을 위한 개인정보유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한다는 정서적 문제가 한국의 자율주행 상용화에 제동을 걸고 있는 셈이다.

건설엔지니어링 역시 마찬가지다. 글로벌 건설엔지니어링 시장의 규모는 1조5,000억달러로 2030년에는 2조달러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AI 확대로 4대 산업 중 성장세가 가장 높은 반도체 시장이 6,000억달러 규모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세계 최대 규모 시장이 건설엔지니어링이다. 미국과 영국 등 상위 7개국이 세계건설엔지니어링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6~7조원 규모의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1% 내외의 미미한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시장에서 명백한 언더독으로 취급받고 있는 한국이지만 정부는 일부 대형 프로젝트수주에 매몰돼 사실상 기초체력을 키운다거나 하는 장기적 방식의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안전을 제일선으로 한 법적 제도와 처벌이 사실상 해외시장에서 발목을 잡기까지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A라는 회사가 설계경제성 검토(VE)를 통해 10억원을 남겼다. 남은 돈은 그대로 국고로 환수됐다. 5년이 지나 시설물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설계책임자였던 B씨는 형사처벌로 징역형을, B씨가 소속된 A사는 1년간 입찰제한을 받았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도 발생했다. 일단 VE를 해서 남은 돈은 발주청과 설계사가 4대 6 비율로 나눠가졌다. 그리고 10년 뒤 똑같이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다. 설계를 맡았던 C사는 계약당시 면책조항으로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1년 뒤 A사와 C사가 해외사업에서 만났다. 한국의 A사는 기술, 가격에서 모두 1등을 했지만 한국에서 받은 입찰제한으로 결국 C사가 수주사로 선정됐다.
위의 예시처럼 한국의 법제도는 사실상 인센티브는 없고 오로지 처벌만 주어진다. 특히 국내의 엄격한 제도는 그나마 해외수주에 뛰어든다는 업체들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모두가 자국기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시대인데 한국만이 엔지니어링사를 외국기업 대하듯 하는 꼴이다. 그나마 인센티브 명분을 붙일 수 있는 VE제도 조차 해외에서는 발주청과 업체가 비율에 따라 분배되지만 한국에서는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국고로 환원될 뿐이다.
▲안전으로 가점장사 하는 한국
물론 이는 극단적 경우로 한국은 평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선제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바로 합산벌점이다. 전국 수천, 수만개에 달하는 현장에 발주청, 산하 공무원들이 무작위로 다니면서 안전문제가 있는 곳에 벌점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누적된 벌점은 계산법을 통해 추후 사업에 반영해서 업체간 변별력으로 작용한다.

자못 타당하고 그럴싸해 보이는 제도의 이면에는 공공사업으로 돈을 버는 건설엔지니어링사를 길들이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정부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분배 논리에 따라 계약법, 건진법 등을 대형사 규제, 지자사 완화에 맞춰 바꾸는 작업을 10여년간 해왔다. 같은 기간 업체수는 1,800여개에서 3,600여개로 두 배로 늘어났다.
시장 규모의 증가폭은 미미한데 공급자가 두배로 증가하니 시장이 어지러워졌다. 결국에는 사건사고가 여기저기 터지면서 정부는 규제를 강화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고 자연스레 발주청의 권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안전이 점수화 되면서 로비가 절정에 달한 이유다.
내부가 혼란하니 점유율이 높은 업체들은 파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전관과 로비로 대응한다. 소형사는 “큰 회사는 이제 밖에 나가서 돈 벌어야 할 것 아닌가”라면서 푸념을 하지만 대형사도 해외수주 비중이 수주총액의 10~20%에 머물고 있는만큼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나로 뭉쳐 대응해나가도 상황을 뒤집기가 어려운 판국에 정부, 발주청은 산업의 진흥보다는 회사들을 서로 경쟁시키고 대정부 협상력을 약화시키면서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발주청 권한 강화를 넘어 이제 신격화 작업에 들어갔다. 올초 국토부는 안전관리 강화 대책 방안으로 국가인증감리제 신설을 밝혔다. 기존 초급-중급-고급-특급으로 이어지는 기술자 제도를 무시하고 사실상 국토부가 인정한 국가인증감리를 선발해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인증감리원을 보유한 업체는 가점을 적용받아 사업수주에 유리하게 되는 것인데 어떠한 기준이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정부가 안전을 가지고 가점장사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제대로 했으면 무죄” 선진 엔지니어링
한국의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건설안전특별법 일명 3대 안전법은 한국 건설산업의 목줄을 쥐고 있는 최악의 법으로 꼽힌다. 처벌의 근거는 행위자의 의도가 전혀 담겨 있지 않고 그저 결과에만 치중해 사고가 나면 무조건 처벌을 받는 식이다. 피해자는 선이요, 가해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는 엔지니어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근로 보장성을 위협하고 있다. 제대로 일 했어도 일단 사람이 죽으면 처벌을 피할 수 없고 재판장에서는 판사가 직접 장송곡을 틀어주면서 피고인들을 악마화시키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영미권에서는 사실상 이러한 형식의 법적 처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계감리는 모든 규정과 기준을 준수해 업무를 수행했다면 사고가 나더라도 엔지니어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간혹 소송으로 인해 법정에 서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마찬가지로 엔지니어의 과실이 없음이 인정되면 배상책임이나 처벌이 없는 판례가 무수히 많다.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전문직 배상책임 보험에 가입하고 사고 발생 시 업무기록을 통해 입증하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차이가 있지만 제대로 했으면 책임을 물지 않는다는 핵심가치는 동일하다. 영국의 경우에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2007년 기업과실치사법이 제정되면서 회사에 책임을 묻는 경우는 있다. 이 때에도 개별 엔지니어가 업무절자를 준수했다면 개인에 대한 형사·민사 처벌은 받지 않는다.
우리와 가장 흡사한 제도를 갖춘 일본에서도 설계감리의 법적 책임 유무는 과실 여부다. 기준을 준수해 설계를 했다가 시설물이 무너진다고 해도 법적 책임이 없다. 물론 일본 형법에는 업무상 과실치사상죄가 있어 업무 중 과실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면 엔지니어도 처벌될 수 있다. 하지만 천재지변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외부요인이 있는 경우에는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있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 운영책임자들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예상할 수 없는 규모의 쓰나미였다”는 이유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에는 정상적으로 수행한 일에 대해서는 이후 책임을 묻지 않는게 우선되야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