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링데일리)박성빈 기자=설계용역 평가제도가 발주청의 갑질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업계는 취지가 무색해진만큼 폐지돼야 한다고 요구한다.
26일 엔지니어링업계에 따르면 설계평가는 부실설계를 방지하겠다는 취지로 지난 2021년 도입됐다. 업계는 제도 설립 목적과 다르게 발주청의 비상식적 요구를 관철하는 수단이 됐다고 지적한다. 평가 등급에 따라 PQ 최대 2점이 부여돼서다. 발주청은 이를 빌미로 강제설계 변경이나 무보수 추가 과업까지 강요하고 있다.
가령 사업지 인근 주민은 시공 시점에서 사업 내용을 인지하고 내 땅을 빼달라거나 넣어달라는 식으로 집단 민원을 제기한다. 민원에 예민한 발주청은 경제성 검토 없이 이를 그대로 반영해 설계변경으로 연결시킨다. 설계사는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채 늘어난 과업을 떠안는다.
업체가 이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설계평가의 시한이 무제한이라서다. 평가 시점이 발주청 재량에 달려 있어 설계사는 착공 수년 뒤까지도 평가점수를 의식해야 한다. 국토부 건설엔지니어링 평가지침 고시는 설계 완료 후 6개월까지 설계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발주청마다 해석은 제각각이다. 도로공사를 비롯한 중앙부처 발주 용역은 착공 후 6개월, 일부 발주청은 시공 공정률 50% 때까지 평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A엔지니어링사 관계자는 “착공 후 몇 년이 지나서도 설계 변경을 요구하면서 점수를 빌미로 협박한다”며 “엿장수 맘대로 휘두르는 제도가 된 지 오래”라고 말했다.
대가 지급 문제도 심각하다. 발주청은 평가점수를 잘 주겠다는 명분으로 무보수 추가 과업을 요구하거나 수의계약 한도인 2,000만원 수준 보상만 제시한다. B엔지니어링사 관계자는 “규모가 큰 국책사업의 설계 변경도 기재부가 사업비 증액에 인색해 애당초 비용의 40-60% 수준으로 편성된다.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환경·재해영향평가 등 따로 대가를 줘야 할 과업까지 설계평가를 이유로 강제한다”고 설명했다.
보복 수단으로도 악용된다. 설계사가 발주청의 설계변경 요구를 거부하면 설계평가 최하점이 매겨진다. 원 설계사는 후속사업에서 배제되고 여타 사업에서까지 불이익을 받는다. B엔지니어링사 관계자는 “한번 거절하면 협조를 안한다는 낙인이 찍히고 평가점수도 최하점을 받는다”며 “시장에서 퇴출되는 셈”이라고 하소연 했다.
업계는 평가기준 자체가 발주청 종속을 유도한다고 꼬집는다. C엔지니어링사 관계자는 “발주자와의 의사소통 정도를 측정하는 항목도 있다”며 “다른 지표도 발주처 재량 정성평가”라고 말했다. 이어 “외부위원이 참여하지만 이들 역시 다음에도 위원을 맡기 위해 발주청 눈치를 본다”고 부연했다.
즉 권한은 발주청이 독점하고 책임은 설계사에게 전가되는 기형적 제도라는 게 업계 비판이다. 최근 감사원이 사업비가 증액된 설계 변경 사례를 문제 삼아 설계사를 소환한 것도 제도의 폐해를 보여주는 예시다. C엔지니어링사 관계자는 “현장 여건으로 변경했다고 소명하면 될 일을 발주청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르쇠로 일관했기 때문”이라며 “발주청 통제는 강화하면서 책임은 우리에 돌릴 수 있는 모순적 제도”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