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삶의 지혜, 우리나라의 지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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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삶의 지혜, 우리나라의 지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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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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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겨울을 나고 음식 숙성을 위해서 지하를 이용하였다. 석빙고 움 석굴암 등 지하공간을 활용한 시설을 보면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바위가 단단하여 대규모 지하공간을 만드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나제통문 단천은광 통영하저터널 등 특이한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터널이나 지하공간이 그리 많지 않다. 신라 백제의 경계였던 나제통문이나 함경도 단천은광, 통영 하저터널 등 특이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터널의 상징성이나 규모로 볼 때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터널은 도로나 수로를 놓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오랜 세월 침략에 시달려온 터라 치도(治道)는 금기시 되었으며 설사 길을 닦는다 해도 터널은 피해갔을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는 바위를 달군 뒤 물로 식혀 깨는 화흉법(火洶法)이 나오는데 이는 바위굴착의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지하공간 축조에는 이렇게 소극적이었지만 공간활용에 있어서는 선인의 지혜가 돋보이는 사례가 많다. 석빙고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올라가며 지하공간 특성을 잘 활용한 새우젓 토굴, 겨울철 곡식저장을 위한 움 등이 이러한 사례가 될 것이다.

석빙고

▲ 경주 석빙고(좌), 청도 석빙고(우)
석빙고는 겨울에 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저장공간이다. 곡물이나 주류 보관을 위해 지하공간을 활용한 사례는 많지만 얼음보관을 위해 지하공간을 활용한 것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다. 지하공간의 가장 두드러진 잇점은 온도변화가 없다는 것인데 석빙고(石氷庫)는 바로 이러한 성질을 잘 활용한 사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초기 노례왕(24~57년) 때 이미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도 지증왕 6년(505년)에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의 빙고전(氷庫典)은 석빙고를 관리하는 부서였으며 전문적으로 얼음을 잘라내 운반하고 수급하는 빙부(氷夫)도 있었다. 서울에는 내빙고 동빙고 서빙고가 있었으며 경주 현풍 청도에도 아직 석빙고가 남아 있다.
석빙고 내벽은 동절기에 내려간 빙점이 여름철까지 지속될 수 있도록 두꺼운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얼음반출을 위해 수시로 여닫는 출입구는 방향이나 두께 바람막이벽을 세심하게 배치하여 온도상승이 없도록 하였다. 내부시설을 보면 돌을 다듬고 정교하게 배치하는 장인의 손길이 보이는 듯하다. 아마도 오랜 세월 빙고를 만드는 과정에서 터득한 기술이 장인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지하곡물저장고

▲ 고모산성 지하곡물저장고
신라시대 문경 고모산성에 만들어진 곡물저장고는 우리나라 지하 목조건축을 대표할만하다. 규모나 형식으로 볼 때 정교한 지하공간 계획과 축조기법이 돋보이며 내부공간도 360㎥에 이른다. 내부구조는 3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땅을 파내려간 다음 수직기둥과 수평보를 교차시키고 그 위에 보를 얹는 순으로 진행하였다.
안에는 곡식과 과실 씨앗류가 발견되었으며 전시에는 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물과 곡식을 함께 저장하는 것은 적정한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곡식을 저장하고 전란이 예고될 경우 긴급하게 물을 채우곤 했을 것이다. 바닥이 점토로 되어 있고 벽면을 판재로 견고하게 처리하여 물을 저장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외에 지하에 만들어진 목조구조물은 주로 백제에 편중되어 있으며 공주 공산성, 대원 월평동, 금산 백령산성, 대전 계족산성, 부여 궁남지, 이천 설성산성 등이 남아 있다. 고모산성 지하저장고는 발굴과정에서 나온 토기나 유물로 보아 자비왕 재위기에 해당하는 5세기 중반 건축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백제의 지하 목조구조물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다. 

통영 해저터널
바다밑으로 길을 내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실제 완성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빌론 시절

▲ 통영 해저터널
유프라테스 강밑에 터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영불해협터널 역시 18세기부터 시도되었지만 완공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1932년 완공된 통영 해저터널은 비록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지만 현존하는 최초 해저터널이라고 볼 수 있다.
터널 길이는 483m로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폭 5m, 높이 3.5m로 차량통행도 가능하지만 현재는 보도용으로만 이용된다. 터널공사는 먼저 공사구간 주변에 흙을 쌓아 물을 막은 뒤 그 안에서 땅을 파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지만 조수간만이 큰 지형조건과 당시의 재료로 볼 때 쉽지 않은 공사였을 것이다.  

나제통문

▲ 나제통문
전북 무주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길이 40m의 작은 터널이다. 지금은 높이 5m 너비 4m로 차도 다닐 수 있지만 과거에는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위치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여서 나제통문이라고 불렸는데 지금도 터널 양쪽 마을의 풍속과 말씨가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이곳이 전략적인 요충지이며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터널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10년 김천과 거창을 잇는 도로를 내며 수레가 다닐 정도로 넓혔으며 1960년대에 지금과 같이 확장되었다. 지반은 화강암이지만 풍화상태가 심하고 자연적으로 벌어진 틈이나 절리가 많다. 이런 조건이라면 정이나 망치만으로도 충분히 뚫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혜의 숙성 공간

▲ 광천 새우젓동굴(좌), 매천 포도주 저장고(우)
숙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김치 젓갈 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의 음식문화다. 광천이나 매천 등 충청도 지역에는 이렇게 음식 숙성에 이용되는 많은 토굴이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곡식이나 건어물을 동굴에 보관한 흔적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 이용되는 동굴은 거의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군수물자 보관을 위해 팟던 동굴을 뒤에 음식숙성 공간으로 이용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광천의 새우젓 토굴과 매천의 포도주 저장소가 있다. 광천에는 깊이가 100m가 넘는 동굴이 40여 곳이나 되는데 온도가 12°C 정도로 항상 일정하여 젓갈을 숙성시키는데 안성맞춤이다. 동굴의 이러한 항온 항습 조건이 빛과 온도에 민감한 포도주 숙성에 유리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매천에도 광천과 유사한 동굴이 90여개가 있는데 이곳은 포도주 숙성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산터널

▲ 광산채굴 및 제련모형
화강암이나 현무암이 많은 우리나라는 산을 뚫어 광물을 캐내는 게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청동기 철기 유물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 광물채굴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천에서 채굴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구리광산은 함경도에 있는 갑산(甲山)이 아닐까 싶다. 기원전부터 청동기가 제작되었던 이곳은 고려 조선시대까지 구리가 생산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미국 일본에 광업권이 넘어가 수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구리와 함께 오랜 채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은광이다. 17세기 우리나라에는 70개소의 은광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동굴이 만들어졌다. 가장 오래된 것은 함경도 단천은광이다. 선조 때 유몽인이 쓴 묵호고(默好稿)에는 동굴 규모 및 제련기술이 적혀 있으며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은을 제련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보재를 대거나 배수 환기 기술이 없어 사고와 인명피해도 컷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익의 성호사설(5권 만물문편)에는 ‘은혈(銀穴)을 파헤치면 인심(人心)이 죽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동굴사고와 관계된 말일 것이다. 조사나 통계는 없지만 광물을 캐면서 만들어진 동굴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불교문화의 꽃 석굴암

▲ 석굴암의 단면과 평면
석굴암이 지하공간으로서 갖는 중요한 의미는 기하학적인 구조와 조각의 섬세함 때문일 것이다. 751년 김대성이 토함산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설계한 석굴암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건축물과 지반 지형이 일체화됨으로서 구조적으로 안정된 덕분이다. 천장은 360개의 석재를 정교하게 짜맞추어 돔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이로 인해 6.8m의 원형공간을 보다 안정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돔형천장에는 중간중간 팔뚝돌을 배치하였는데 이로 인해 천장무게가 자연스럽게 분산된다. 바깥쪽으로는 자갈로 배수층을 두어 실내가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였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석굴암은 불교문화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38개의 조상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조각과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다.  
 

▲ 호로고루 성터의 움과 탄화된 곡식
움은 땅을 파고 나무로 널을 얹어 만든 소규모의 지하공간을 말한다. 사계변화가 뚜렷하고 추수가 가을에 집중되는 우리나라는 예부터 이러한 움이 곡식을 보
 
▲ 동일기술공사 김재성지반터널본부장(부사장)
관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최근까지도 겨울이 시작될 무렵 뒤뜰에 움을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마도 긴 겨울밤 움에서 꺼내 온 무나 고구마를 먹던 추억은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경기도 연천에서 발견된 호로고루성의 움은 군량을 보관하던 시설이다. 깊이 3m 정도의 정방형으로 만들어진 이곳에는 쌀 조 콩 팥 등의 탄화된 곡식과 함께 식용으로 비축한 동물의 뼈도 들어 있었다. 움의 형식은 먼저 통나무를 고르게 깔아서 바닥을 만들고 사방은 돌을 쌓아서 벽체를 만들었으며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의 형식은 남아있지 않지만 바닥처럼 통나무로 널을 만들고 그 위에 거적과 흙으로 덮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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